우산 하나면 충분한 사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9화. 우산 하나면 충분한 사이

“하나만 가져와.”

해원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전화기 너머의 태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산 하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까이 붙어 걷겠다는 말.

비에 젖지 않으려면 서로의 어깨가 닿아야 하고, 바람이 불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팔을 붙잡아야 하는 거리.

태헌이 낮게 웃었다.

“윤해원.”

“왜.”

“나 지금 표정 관리 안 되는 거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안 보이는데.”

“다행이네.”

“뭐가?”

“보였으면 네가 또 도망갔을 것 같아서.”

해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도망갔다고.”

“늘.”

“내가?”

“내가 한 걸음 가면 넌 반 걸음 뒤로 가잖아.”

그 말에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맞았다.

태헌이 가까이 오면 좋으면서도 겁이 났다.

좋은 마음이 커지는 것도 무서웠고, 그 마음에 익숙해지는 것은 더 무서웠다.

사람은 없는 것보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더 아파하니까.

해원은 이미 그것을 알 만큼 살아왔다.

“태헌아.”

“응.”

“사람이 나이 먹으면 겁이 없어질 줄 알았거든.”

“근데?”

“더 많아지는 것 같아.”

태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당연하지.”

“왜?”

“잃어본 게 많으니까.”

해원의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태헌은 가끔 이렇게 해원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의 뒤쪽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나도 서두르기 싫어.”

“뭘?”

“너.”

해원이 웃었다.

“사람을 어떻게 서둘러.”

“그러니까.”

태헌이 말했다.

“천천히 가자.”

그 말이 좋았다.

사랑하자도 아니고.

우리 만나자도 아니고.

천천히 가자.

지금의 해원에게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며칠 뒤.

태헌에게 사진 한 장이 왔다.

푸른 바다였다.

그 앞에 카라반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어때?’

해원은 사진을 확대했다.

바다 가까이에 작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도 있었다.

‘예쁘네.’

‘갈래?’

역시나.

이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어디야?’

‘남쪽.’

‘남쪽 어디?’

‘그건 오면 알려주지.’

‘안 가.’

‘그럼 알려줄게.’

해원이 웃었다.

‘혼자 갔어?’

잠시 뒤 답이 왔다.

‘응.’

사진을 다시 봤다.

의자는 두 개였다.

‘혼자 갔는데 의자는 왜 두 개야?’

태헌에게서 답이 없었다.

해원은 괜히 물었다 싶었다.

조금 뒤 메시지가 왔다.

‘혹시 올까 봐.’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내가?’

‘응.’

‘내가 간다고 했어?’

‘안 했지.’

‘그런데?’

‘그래도 하나 더 폈어.’

그 말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기다린다는 말보다 더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라고 재촉하지 않고,

언제 올 거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의자 하나를 더 펴놓는 사람.

해원은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태헌의 빈 옆자리.

갑자기 그곳에 앉아보고 싶었다.

‘커피 있어?’

해원이 물었다.

태헌의 답이 바로 왔다.

‘있지.’

‘맛있는 거?’

‘내가 타주는 건 다 맛있어.’

‘자신감은.’

‘라면도 있어.’

‘안 먹어.’

‘고기도.’

‘안 먹어.’

‘와인도.’

‘술 안 마셔.’

잠시 후.

‘나도 있는데.’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제일 별로.’

‘진짜 안 올 거야?’

이번에는 장난기가 조금 빠진 문장이었다.

해원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카라반 사진을 다시 열었다.

바다.

의자 두 개.

그리고 저녁이면 켜질 것 같은 작은 조명.

그곳에서 태헌과 나란히 앉아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해원은 요즘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좋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고,

웃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저 옆에 앉아 있어도 되는 사람.

태헌이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해원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열었다.

태헌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그게 또 이상했다.

오라고 해놓고 왜 연락이 없지?

그러다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윤해원, 너 왜 이래.”

오라고 계속하면 부담스럽다고 할 것이고,

연락을 안 하면 왜 안 하냐고 생각한다.

자신도 자신을 모르겠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 해원이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자?’

숫자 1이 바로 사라졌다.

‘아니.’

‘뭐 해?’

‘바다 보고 있어.’

‘혼자?’

‘응.’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안 외로워?’

답장이 늦었다.

‘조금.’

솔직한 대답이었다.

해원은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왜 혼자 갔어.’

‘혼자 있고 싶어서 왔는데.’

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

‘와보니까 네가 있으면 좋겠더라.’

해원은 천장을 바라봤다.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스무 살이었다면 당장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은 다르다.

여행을 같이 가고 싶은 마음과 인생을 같이 걷는 마음도 다르다.

그래서 더 천천히 보고 싶었다.

태헌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여자가 되는지.

다음 날 아침.

해원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작은 가방 하나를 꺼냈다.

옷 한 벌.

세면도구.

충전기.

그게 전부였다.

가방을 내려다보다 혼자 웃었다.

“뭐 하는 거야.”

갈 생각이 없었다.

정말이었다.

그런데 준비는 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일어났어?’

‘응.’

‘오늘 뭐 해?’

해원은 가방을 바라봤다.

‘별일 없어.’

‘그럼 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

잠시 후 위치가 도착했다.

해원은 지도를 열어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멀었다.

차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멀잖아.’

‘그러니까 오지 마.’

해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피곤하잖아.’

어제는 오라더니 오늘은 오지 말란다.

괜히 심술이 났다.

‘알았어. 안 가.’

‘응.’

정말 끝이었다.

붙잡지도 않았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진짜 안 가.”

10분 뒤.

해원은 세수를 했다.

20분 뒤.

옷을 갈아입었다.

30분 뒤.

차 키를 들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면서 혼잣말했다.

“바다 보러 가는 거야.”

태헌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해원은 멀리 카라반을 발견했다.

사진 속 그곳이었다.

바다가 보였고,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태헌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해원은 차에서 내렸다.

일부러 전화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갔다.

태헌은 한참 뒤에야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이 멈췄다.

“너…….”

해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커피 있다며.”

태헌은 몇 초 동안 말없이 해원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웃었다.

해원은 그 웃음 때문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웃어?”

“좋아서.”

“뭐가.”

“네가 와서.”

너무 솔직해서 할 말이 없었다.

태헌이 일어났다.

“진짜 올 줄 몰랐어.”

“나도 올 줄 몰랐어.”

“그런데 왜 왔어?”

해원은 바다를 바라봤다.

“그냥.”

“그냥?”

“바다 보고 싶어서.”

태헌이 웃었다.

“그래. 바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태헌은 커피를 만들었다.

해원은 의자에 앉았다.

두 개의 의자 중 하나.

어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리.

태헌이 커피를 건넸다.

“마셔.”

해원이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거봐.”

“커피가 좋은 거겠지.”

“사람이 좋은 거야.”

“또 시작이다.”

둘이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해원의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흩날렸다.

태헌이 손을 뻗다가 멈췄다.

그 작은 동작을 해원이 봤다.

“왜?”

“머리카락.”

“뭐?”

“아니야.”

태헌은 손을 거뒀다.

해원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알았다.

이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해원이 허락하기를.

해원은 몸을 조금 태헌 쪽으로 돌렸다.

“해줘.”

“뭘?”

“머리.”

태헌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해원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이 볼에 아주 잠깐 닿았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바닷소리만 들렸다.

태헌이 먼저 손을 내렸다.

“됐다.”

해원은 이상하게 아쉬웠다.

“그게 끝이야?”

말이 튀어나왔다.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뭐가?”

“아니.”

해원은 급히 커피를 마셨다.

태헌이 웃었다.

“윤해원.”

“왜.”

“나 지금 참는 중이야.”

해원의 손이 멈췄다.

“뭘?”

“말 안 할래.”

“왜?”

“말하면 네가 서울 갈 것 같아서.”

해원은 웃었다.

“겁쟁이.”

“누가?”

“너.”

태헌이 몸을 조금 돌렸다.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내가 겁쟁이 같아?”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의 눈을 바라봤다.

그날 차 안에서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태헌이 낮게 물었다.

“여기까지 괜찮아?”

또 그 말이었다.

해원은 그 질문이 좋았다.

그가 매번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

해원은 이번에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응.”

태헌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여기도?”

해원은 웃었다.

“그걸 계속 물어볼 거야?”

“네가 싫다고 할 때까지.”

“바보.”

“알아.”

둘 사이에는 이제 손바닥 하나 정도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해원은 태헌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말했다.

“태헌아.”

“응.”

“나 아직 무서워.”

태헌은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알아.”

“뭐가 무서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것도 괜찮아.”

“근데.”

해원이 숨을 한번 들이켰다.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

태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해원은 처음으로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됐지?”

태헌이 아주 천천히 웃었다.

“충분해.”

그리고 그는 해원의 손을 잡았다.

그뿐이었다.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끌어안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해가 조금씩 내려갔다.

바다는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해원은 문득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사랑이란 무언가 뜨거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하루라도 연락이 없으면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감정.

하지만 지금 태헌과 나란히 앉아 있으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떠나고 싶지 않은 시간인지도 몰랐다.

태헌이 손가락에 힘을 조금 주었다.

해원도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해원아.”

“응.”

“오늘 자고 갈래?”

해원의 손이 굳었다.

태헌이 바로 웃었다.

“카라반에서.”

해원이 그를 쳐다봤다.

“너 일부러 그렇게 말했지?”

“뭘?”

“죽을래?”

태헌이 크게 웃었다.

“난 밖에서 잘게.”

“됐어.”

“그럼 너 밖에서 잘래?”

“미쳤어?”

둘은 한참 웃었다.

그러다 해원이 물었다.

“진짜 여기서 자도 돼?”

태헌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응.”

“너는?”

“어디서든 자면 되지.”

해원은 카라반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봤다.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누군가의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였던 사람도,

일해야 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윤해원으로 있고 싶었다.

태헌 옆에서.

“태헌아.”

“응.”

해원이 말했다.

“오늘은 안 갈래.”

태헌은 웃지 않았다.

장난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해원의 손을 조금 더 따뜻하게 잡았다.

“그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날 밤.

카라반 앞에 작은 불빛이 켜졌다.

두 사람은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 이야기.

제주 이야기.

살면서 놓친 것들.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

그러다 어느 순간 말이 끊겼다.

바다는 검게 변해 있었다.

해원이 먼저 일어났다.

“나 들어갈게.”

태헌도 일어났다.

“응.”

해원이 카라반 문 앞에서 돌아봤다.

태헌은 조금 떨어진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해원이 물었다.

“진짜 거기 있을 거야?”

“응.”

“왜?”

태헌이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원은 알았다.

오늘 여기까지를 결정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태헌이었다.

그는 해원이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만 다가왔고,

그녀가 다시 자신에게 걸어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남겨두었다.

해원은 문을 열었다.

그러다 다시 닫았다.

태헌을 바라봤다.

“강태헌.”

“왜?”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잘 자.”

태헌이 웃었다.

“너도.”

해원은 카라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문밖에는,

해원이 조금 전까지 잡고 있던 손의 온기를 바라보며 웃는 강태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입맞춤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부터,

둘 사이에는 이미 친구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1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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