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제주에서

젖은 운동화. 작은 우산 하나.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8화. 그날, 제주에서

비가 오던 제주.

젖은 운동화.

작은 우산 하나.

그리고 해원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지던 검은 우산.

해원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태헌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억 안 나?’

기억났다.

아니, 이제야 기억이 났다.

해원에게 그날은 그저 제주에서 비를 맞았던 어느 하루였다.

하지만 태헌에게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해원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비 엄청 왔던 날?’

곧바로 답이 왔다.

‘이제 기억나?’

‘조금.’

‘조금?’

‘나 기억력 안 좋은 거 알잖아.’

한참 답이 없었다.

그러다 태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운하네.’

해원은 웃었다.

‘뭐가?’

‘나는 그날 때문에 너 좋아하게 됐는데.’

웃음이 멈췄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날 때문에?

대체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던가.

기억은 아주 천천히, 오래된 필름처럼 돌아오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제주.

그때의 해원은 지금보다 더 바빴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처리할 일이 많았다.

제주에 내려와도 여행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제주가 바다이고 여행이고 휴식이라면, 해원에게 제주는 해야 할 일이 기다리는 또 하나의 생활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비가 올 것 같았지만 해원은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설마 많이 오겠어.”

늘 그런 식이었다.

괜찮겠지.

별일 없겠지.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오후가 되자 비가 쏟아졌다.

해원은 처마 밑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미치겠네.”

그때 전화가 왔다.

태헌이었다.

“어디야?”

“제주.”

“제주 어디?”

“왜?”

“나도 제주야.”

해원은 놀랐다.

“네가 왜 제주에 있어?”

“볼일 있어서 왔지.”

“언제 왔는데?”

“어제.”

“그럼 말하지.”

“말하면 만났을 거야?”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이 웃었다.

“거봐.”

그때는 두 사람이 지금처럼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알고 지낸 지는 꽤 되었지만 서로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가끔 연락하고.

가끔 농담하고.

오래 연락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

딱 그 정도였다.

태헌이 물었다.

“근데 왜 빗소리가 그렇게 커?”

“비 오잖아.”

“실내 아니야?”

“밖이야.”

“우산은?”

“없어.”

태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거기 어디야?”

“됐어.”

“어디냐고.”

“비 그치면 가면 돼.”

“해원아.”

그날도 태헌은 그렇게 불렀다.

해원아.

이상하게 그 남자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사람을 잠깐 멈추게 했다.

“주소 보내.”

“괜찮다니까.”

“알아.”

태헌이 말했다.

“네가 괜찮은 건 아는데,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태헌은 늘 같은 방식이었다.

해원이 할 수 없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말했다.

부담을 갖지 못하게.

30분쯤 지나 검은 차 한 대가 들어왔다.

태헌이 내렸다.

손에는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너 진짜 왔어?”

“그럼 가짜로 와?”

“비 그치면 알아서 갔을 텐데.”

“알아.”

“그런데 왜 왔어?”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원의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이미 물에 젖어 있었다.

“신발 다 젖었네.”

“마르면 돼.”

“추워?”

“안 추워.”

태헌이 피식 웃었다.

“넌 맨날 안 춥고 안 힘들고 안 아프지?”

“맞아.”

“참 편리한 인간이다.”

“뭐?”

“고장 나도 고장 났다고 말을 안 하니까.”

해원이 그를 흘겨봤다.

“나 멀쩡하거든?”

“알았어. 멀쩡한 황해원 씨.”

둘은 우산 하나를 쓰고 걸었다.

우산은 크지 않았다.

둘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좁았다.

해원은 태헌에게서 거리를 두려고 우산 끝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태헌이 말했다.

“붙어.”

“뭐?”

“그러다 다 젖어.”

“괜찮아.”

“난 안 괜찮아.”

태헌이 해원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살짝 당겼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해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그때는 몰랐다.

옆에 걷던 남자가 자신을 여자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해원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태헌의 오른쪽 어깨가 계속 젖고 있었다.

우산이 해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야.”

“왜?”

“우산 똑바로 써.”

“똑바른데.”

“네 어깨 다 젖었잖아.”

태헌은 자기 어깨를 한번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르면 돼.”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따라 하지 마.”

“뭘?”

“내가 아까 신발 젖었다니까 마르면 된다고 했잖아.”

태헌이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마르면 되지.”

해원은 우산 손잡이를 빼앗았다.

“내가 들게.”

“됐어.”

“줘.”

“싫어.”

“왜?”

태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가 들면 너 쪽으로 안 기울일 것 같아서.”

해원은 그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별 이상한 인간 다 보겠네.”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걸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태헌이 왜 비를 맞으면서도 우산을 자신에게 기울였는지.

차에 타자 태헌은 히터를 켰다.

“배고파?”

“아니.”

“뭐 먹자.”

“안 배고프다니까.”

“나는 배고파.”

“그럼 너 먹어.”

“혼자 먹기 싫어.”

결국 두 사람은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비가 와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해원은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가락 먹었다.

몸이 풀렸다.

“맛있지?”

태헌이 물었다.

“응.”

“배 안 고프다며.”

“조금 고팠나 봐.”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해원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웃어?”

“그냥.”

“뭐가 그냥이야.”

“너 웃겨서.”

“내가 뭐가 웃겨.”

태헌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해원아.”

“응.”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나 안 힘든데?”

태헌이 웃었다.

“그래. 알았어.”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해원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태헌은 몇 년이 지나서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안 힘들다는 말 좀 하지 마.’

사람은 변하는데,

태헌이 해원을 바라보는 방식은 그때부터 별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해원이 말했다.

“나 숙소 데려다주면 돼.”

“벌써?”

“왜?”

“제주까지 와서 밥만 먹고 헤어져?”

“그럼 뭘 해?”

태헌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바다 보러 갈래?”

“비 오는데?”

“비 오니까.”

해원은 어이가 없었다.

“너 좀 이상하다.”

“원래 그래.”

둘은 바다로 갔다.

비 오는 제주 바다는 흐렸다.

파도는 거칠었고 바람도 불었다.

관광객도 거의 없었다.

해원은 차에서 내려 바다 앞에 섰다.

태헌도 옆에 섰다.

“좋다.”

해원이 말했다.

“뭐가 좋아. 비 오고 춥구먼.”

“아무도 없잖아.”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바다만 보고 있었다.

“가끔은 사람이 없는 데 있고 싶어.”

“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서울에서도 아무것도 안 하면 되잖아.”

해원이 웃었다.

“서울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죄짓는 것 같아.”

“왜?”

“모르겠어.”

해원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집도 챙겨야 하고.”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는 그냥 가방 하나 들고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

태헌은 그 말을 기억했다.

해원은 잊었지만.

현재.

해원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각났다.’

태헌의 답이 바로 왔다.

‘이제?’

‘응.’

‘너 그날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

‘뭐라고 했는데?’

‘가방 하나 들고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어.’

해원의 눈이 커졌다.

자신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태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아직 기억해?’

‘응.’

‘왜?’

잠시 후.

‘그날부터였으니까.’

해원의 가슴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뭐가?’

‘네가 여자로 보인 게.’

해원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헌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바다 보면서 웃는데.’

‘갑자기 예뻐 보였어.’

해원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응.’

‘그전에는 안 예뻤어?’

한참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는 그냥 황해원이었지.’

“뭐야.”

해원이 혼자 웃었다.

‘그날은?’

태헌이 답했다.

‘여자 황해원.’

해원은 더 이상 장난을 칠 수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말에 덜 흔들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 깊이 들어왔다.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잊은 어느 날의 모습을 누군가 오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해원이 물었다.

‘그럼 왜 말 안 했어?’

이번에는 답장이 오래 걸렸다.

‘그때는 때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때?’

‘네가 나를 볼 때.’

해원의 손이 멈췄다.

‘나는?’

‘응.’

‘나는 너 안 봤어?’

‘남자로는 안 봤지.’

맞았다.

그때의 해원에게 태헌은 그냥 편한 사람이었다.

한 살 어린 남자.

말이 잘 통하는 사람.

가끔 장난을 주고받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기다렸어?’

태헌의 답이 왔다.

‘기다린 건 아니야.’

그리고 잠시 후.

‘그냥 살았지.’

그 말이 해원은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5년을 기다렸다는 말보다 훨씬 좋았다.

각자의 인생을 살았고,

각자의 시간을 지나왔고,

그러다 지금 다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

그게 두 사람다웠다.

저녁 무렵 태헌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해?”

“아무것도.”

“잘했네.”

“뭘 잘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해원이 웃었다.

“너는?”

“집 가는 중.”

“일곱 군데 다 갔어?”

“응. 죽겠다.”

“그러다 마음의 병 된다.”

“뭐?”

해원이 웃으며 말했다.

“힘들면 좀 쉬라고.”

태헌도 웃었다.

“이제 내 말 따라 하네.”

“아프면 아픈 만큼 열심히 살아.”

“누가 그래?”

“내가.”

“싫은데.”

“왜?”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말했다.

“아프면 아픈 만큼 쉬고 싶어.”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아.”

“응.”

“우리 이제 그렇게 살자.”

우리.

그 단어가 해원의 마음에 걸렸다.

좋은 의미로.

“어떻게?”

“힘들면 쉬고.”

“응.”

“보고 싶으면 보고.”

“응.”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응.”

태헌이 잠시 말을 멈췄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그것만 대답 안 해?”

“그건 생각해 본다 했잖아.”

“언제까지?”

“몰라.”

“또 5년?”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기다릴 거야?”

태헌도 웃었다.

“아니.”

“그럼?”

“그전에 데리고 갈 거야.”

“어디를?”

“제주.”

해원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태헌이 말했다.

“그날 갔던 바다 다시 가자.”

“비 안 오면?”

“비 올 때까지 기다리지 뭐.”

“미쳤어?”

“카라반 끌고 가면 되잖아.”

해원은 눈을 감았다.

비 오는 제주.

작은 우산.

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작되어 버린 한 남자의 마음.

“해원아.”

“응.”

“갈래?”

이번에는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한참 뒤 해원이 말했다.

“생각해 볼게.”

태헌이 웃었다.

“그 말 이제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인데?”

“가고 싶다는 뜻.”

“아니거든.”

“맞아.”

“아니야.”

“윤 해원.”

“왜.”

“이번에는 우산 두 개 가져갈게.”

해원이 웃었다.

“왜?”

“또 내 어깨 다 젖으면 네가 잔소리할 거잖아.”

해원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하나만 가져와.”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해원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왜 말이 없어?”

태헌이 아주 낮게 웃었다.

“하나?”

“응.”

“우산 하나?”

“응.”

“그럼 붙어 걸어야 하는데.”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러라고.”

태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해원이 기다렸다.

잠시 후.

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원아.”

“응.”

“나 지금 제주 가고 싶다.”

해원이 웃었다.

“참아.”

“너도?”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도 같은 곳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몇 년 전 비가 내리던 그 바다에서 태헌의 마음이 먼저 시작됐다면,

이번에는 어쩌면 해원의 마음이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날에는 태헌이 우산을 해원 쪽으로 기울였다.

다음에는,

해원이 조금 더 그의 쪽으로 걸어가 볼 생각이었다.

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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