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남았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3화. 우리가 다시 만난 나이
해원은 가끔 태헌과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읽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디냐고 묻고, 밥은 먹었냐고 묻고, 오늘은 힘들었다고 투덜거리고,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주변 사람 이야기로 흘러가기도 했다.
젊은 날의 연애처럼 밤새 사랑을 확인하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별것 아닌 말들이 오래 남았다.
오히려 이 나이가 되고 나니 사랑한다는 말보다
“밥 먹었어?”
“오늘 많이 힘들었지?”
그런 말 하나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태헌은 해원보다 한 살 어렸다.
한 살.
숫자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차이였다.
하지만 해원은 가끔 그 한 살을 핑계 삼았다.
태헌이 장난을 치면 어린 사람이라 그랬고, 말끝을 흐리면 역시 한 살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겁날 때마다 해원이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가장 만만한 핑계가 그의 한 살이었다.
그날 밤도 그랬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집으로 돌아온 해원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몸이 먼저 소파 깊숙이 가라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것조차 귀찮았다.
창밖으로 늦은 밤의 불빛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하루가 끝나면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달랐다.
하루가 끝나면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누군가에게 묻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던졌다가 스스로 거두는 질문이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해원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면서도 바로 받지 않았다.
두 번쯤 울린 뒤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뭐 해?”
“그냥 있어.”
“그냥 있는 사람 목소리가 아닌데.”
해원은 피식 웃었다.
“목소리만 듣고 뭘 안다고.”
“알지.”
태헌은 너무 쉽게 말했다.
“뭘 알아?”
“오늘 힘들었잖아.”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별것 아닌 말인데 순간 목이 메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하루를 알아주는 것.
그게 이렇게 위로가 되는 일이었나 싶었다.
“밥은?”
“먹었어.”
“거짓말.”
“먹었다니까.”
“너 피곤하면 밥 안 먹잖아.”
해원은 몸을 일으켰다.
“너 나 감시하니?”
“관찰하지.”
“그게 더 무서워.”
태헌이 웃었다.
해원도 따라 웃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굳이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에서만 생기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헌이었다.
“해원아.”
“응.”
“우리 나이에 사람 좋아하는 건 뭐가 다를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해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너답지 않게 어려운 질문을 하네.”
“그러니까 한 살 더 먹은 네가 대답해 봐.”
“또 한 살 가지고 그러지?”
둘이 동시에 웃었다.
하지만 해원은 곧 조용해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궁금했다.
스무 살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무엇이 다를까.
그때는 좋아하면 달려갔다.
보고 싶으면 만났고, 서운하면 화를 냈고, 헤어지자는 말을 던졌다가 다시 붙잡았다.
사랑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굴었다.
지금은 달랐다.
보고 싶어도 참을 줄 알았고,
궁금해도 묻지 않을 줄 알았다.
상대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하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
해원이 천천히 말했다.
“덜 기대하는 거 아닐까?”
“왜?”
“살아봤으니까.”
“뭘?”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태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해원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는 좋아하면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냥 그 사람이 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난 아닌데.”
“뭐가?”
“난 욕심나는데.”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태헌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잘 지내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내 옆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헌은 가끔 이렇게 들어왔다.
문을 두드리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왜 대답 없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럼 됐어.”
또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해원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태헌아.”
“응.”
“넌 왜 나야?”
말하고 나서 해원은 후회했다.
묻지 말걸.
이 나이에 이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태헌은 웃지 않았다.
“글쎄.”
“봐. 모르잖아.”
“아니. 설명하기가 어려운 거야.”
잠시 후 태헌이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네가 재미있었어.”
“뭐?”
“엉뚱하고, 세고, 말도 안 지고.”
“욕이지?”
“끝까지 들어.”
해원이 웃었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까 이상하더라.”
태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센 사람이 아니더라고.”
해원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뭐?”
“센 척하는 사람 같았어.”
그 말은 생각보다 깊이 들어왔다.
해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아파도 움직이는 것.
마음이 무너지는 날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드는 것.
그것이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자신조차 그것을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원이 겨우 물었다.
“그래서 자꾸 신경 쓰였어.”
“불쌍해서?”
“아니.”
태헌은 단호했다.
“좋아져서.”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헌이 다시 말했다.
“해원아.”
“응.”
“나 너보다 한 살 어리지.”
“알면서 왜 물어.”
“그런데 그 한 살 때문에 나를 자꾸 애 취급하지 마.”
“내가 언제.”
“맨날.”
해원이 웃었다.
“어린 건 사실이잖아.”
“겨우 한 살.”
“한 살도 한 살이야.”
태헌은 잠시 조용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그 한 살 내가 따라잡을게.”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네가 잠깐 서 있으면 되지.”
웃고 있던 해원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장난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빨리 걷고 있었을까.
무엇을 따라잡으려고,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한 번도 제대로 멈추지 못하고 살아왔을까.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응.”
“가끔은 좀 서 있어.”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갈게.”
그 말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젊었을 때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지금의 해원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혼자 길을 찾을 수도 있었고,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는 법도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을 데려가 줄 남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사람은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이 잠시 멈춰 섰을 때
천천히 걸어와 옆에 서주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태헌아.”
“왜?”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왜?”
“어른 같아서.”
태헌이 웃었다.
“원래 어른이야.”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또 시작한다.”
해원이 웃었다.
오랜만에 편하게 웃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해원은 한동안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이면 또 자신의 하루를 살아야 했다.
그런데 조금 전보다 덜 외로웠다.
해원은 그제야 알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는 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가끔 같은 방향을 바라봐주는 것.
그리고 너무 지친 날에는
먼저 가지 않고 잠시 기다려주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몰랐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 다시 화면을 켰다.
그리고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태헌아.’
곧 답이 왔다.
‘왜?’
해원은 한참 망설이다가 적었다.
‘나 조금 서 있을게.’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잠시 뒤 진동이 울렸다.
태헌의 답장은 단 한 줄이었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해원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무 살처럼 뜨겁게 달려가는 사랑이 아니라,
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두 사람이
서로의 속도에 맞춰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사랑.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남자가
그날 처음으로
해원에게는 꽤 오래 기다려보고 싶은
한 사람의 어른으로 보였다.
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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