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하나 가져오라며.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2화
돈 말고, 내 얘기
네가 도망가지 않을 만큼씩만.
해원은 그 문장을 밤새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웃겼다.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다고.
두 번째에는 조금 궁금했고,
세 번째부터는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태헌이 숨긴 것이 돈만은 아니라는 말.
그동안 해원이 알고 있던 강태헌은 늘 단단했다.
누구에게 기대는 법도 없고,
혼자 밥을 먹어도 괜찮고,
몇 달씩 낯선 나라를 돌아다녀도 외롭지 않은 사람.
힘든 일이 있어도 농담으로 넘겼고,
상처를 이야기할 때조차 남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런데 어젯밤,
돈 말고.
내 얘기.
그 두 문장이 해원이 알고 있던 남자를 조금 다르게 보게 했다.
다음 날 오전,
태헌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시간 돼?
해원은 잠시 고민했다.
왜.
내 얘기 하나 가져오라며.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정말 가져오게?
응.
비싼 얘기야?
돈 안 받아.
그럼 들어줄게.
답장은 바로 왔다.
저녁 먹자.
약속 장소는 의외로 평범했다.
한강이 보이는 작은 식당.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비싼 메뉴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태헌은 이미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왜 이런 데어?”
“왜.”
“너 이런 데도 와?”
태헌이 웃었다.
“나 사람인데.”
“아니, 나는 이제 네가 뭘 해도 의심돼.”
“그러지 마.”
“왜.”
“피곤해.”
“나는 이제까지 속았는데?”
“속인 적 없어.”
“안 말한 것도 속인 거야.”
태헌이 물컵을 해원 쪽으로 밀었다.
“그럼 오늘 하나 말해줄게.”
해원은 물을 마시려다 손을 멈췄다.
“진짜?”
“응.”
“뭔데.”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음식이 나왔다.
해원은 기다렸다.
태헌은 밥을 한 숟갈 먹었다.
해원이 참지 못했다.
“야.”
“왜.”
“말한다며.”
“밥 먹고.”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밥이 넘어가?”
태헌이 웃었다.
“너 원래 잘 먹잖아.”
“강태헌.”
“알았어.”
태헌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나 누나 넷 있어.”
“알아.”
“친누나는 아니고.”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배다른 누나들.”
태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버지가 먼저 낳은 딸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태어났을 때 이미 다 컸어.”
“많이 차이 나?”
“많이.”
“사이는?”
태헌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에는 온기가 없었다.
“좋았으면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하겠냐.”
해원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태헌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짧게 말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어릴 때부터 느꼈어.”
“뭘.”
“나는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구나.”
해원의 손이 멈췄다.
태헌은 물컵만 바라봤다.
“누나들 입장에서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남동생이었겠지.”
“그래도 애였잖아.”
“사람은 꼭 애라고 봐주진 않아.”
해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한테 뭐 하나 해주면 불편해했고.”
“…….”
“칭찬하면 더 싫어했고.”
“태헌아.”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해원이 처음으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강태헌도,
야도 아닌,
그냥 태헌아.
태헌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곧 웃었다.
“불쌍한 척하는 건 아니야.”
“내가 언제 불쌍하다고 했어.”
“얼굴에 쓰여 있어.”
“그런 얼굴 아니거든.”
“지금 딱 그래.”
해원이 젓가락으로 그의 그릇을 툭 건드렸다.
“먹어.”
태헌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따뜻했다.
식사가 절반쯤 끝났을 때 해원이 물었다.
“그래서 가족하고 거의 안 만나?”
“필요할 때만.”
“명절은?”
“귀찮아.”
“산소는 가잖아.”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
“전에 말했잖아.”
태헌이 한참 해원을 바라봤다.
“그걸 기억해?”
“네가 말한 건 웬만하면 기억하지.”
그 말이 나오고서야 해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태헌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위험하네.”
“뭐가.”
“네가 너무 많이 기억해서.”
해원이 웃었다.
“그러게 왜 나한테 다 말해.”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한강 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해원은 천천히 걷다가 물었다.
“누나들하고 재산 문제도 있어?”
태헌이 잠시 멈췄다.
“있었지.”
“지금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
“많이 싸웠어?”
“나는 싸우기 싫어서 멀어졌어.”
“그럼 네가 가진 건?”
태헌이 웃었다.
“또 돈 얘기?”
“아니.”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가 왜 돈 많은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돈 보고 오는 여자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아서.”
태헌의 걸음이 멈췄다.
“누가 그래?”
“내가.”
“역시 이해력은 빠르네.”
“누구한테 배웠는데.”
둘이 동시에 웃었다.
그러다 해원이 물었다.
“근데 너 왜 여자들 시험해?”
태헌의 웃음이 사라졌다.
“누가 그랬어?”
“네가 말했잖아.”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만난 여자들 이야기하면서.”
태헌은 잠시 생각했다.
“시험이라기보다…”
“보는 거지.”
“뭘.”
“사람을.”
해원의 말에 태헌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맞아.”
“뭘 봐?”
“작은 거.”
“예를 들면?”
“식당 직원한테 말하는 태도.”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 없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
“응.”
“약속.”
“응.”
“거짓말.”
태헌이 해원을 봤다.
“그게 제일 중요해.”
해원은 웃었다.
“정직한 사람들이네.”
태헌이 피식 웃었다.
“뭐?”
“너.”
“왜.”
“맨날 정직 타령하잖아.”
“중요하니까.”
“알아.”
해원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너랑 오래 친구하나 봐.”
태헌은 걷던 걸음을 멈췄다.
“왜.”
해원이 돌아봤다.
“나는 거짓말 잘 못하잖아.”
“알아.”
“고지식하고.”
“엄청.”
“융통성도 없고.”
“심각하지.”
해원이 눈을 흘겼다.
“좋은 말 좀 해.”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장난치지 않았다.
“그래도 믿을 수 있어.”
해원의 표정이 멈췄다.
“뭐?”
“너.”
태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꽤 믿을 수 있는 사람.”
해원은 괜히 앞을 바라봤다.
가슴이 조금 이상했다.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 담백했고,
고백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가 예쁘다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이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잠시 뒤 해원이 말했다.
“그래서 네 재산 누구 줄 건데?”
태헌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
“갑자기?”
“궁금하잖아.”
“왜. 네가 받을래?”
“미쳤어?”
“반응이 너무 빠른데.”
“네 돈 관심 없어.”
태헌이 웃었다.
“알아.”
그 말이 너무 빨라서 해원이 오히려 그를 봤다.
“어떻게 알아?”
태헌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게 내가 널 오래 보는 이유 중 하나니까.”
해원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무슨 뜻이야.”
태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냥 그렇다고.”
“또 말 돌려?”
“오늘 하나만 말하기로 했잖아.”
“그게 누나 얘기야?”
“응.”
“너 진짜 치사하다.”
“다음에 하나 더.”
“언제.”
태헌이 웃었다.
“네가 안 도망가면.”
차로 돌아오는 길,
해원은 태헌에게 물었다.
“너 진짜 죽으면 재산 어떻게 할 거야?”
태헌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 쓰고 죽어야지.”
“그게 가능해?”
“노력해야지.”
“그래도 남겠지.”
“많이 남겠지.”
해원이 피식 웃었다.
“재수 없어.”
“사실이잖아.”
“그럼 남은 건?”
태헌은 잠시 생각했다.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걸었다.
“뭐라고?”
“내 옆에 끝까지 있는 사람한테 주고 가면 되지.”
해원이 빠르게 따라갔다.
“그게 누군데.”
“나도 모르지.”
“부인이면?”
“그럴 수도 있고.”
“자식은?”
태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없어.”
“생길 수도 있잖아.”
“이 나이에?”
“왜. 늦둥이.”
태헌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해.”
해원은 그 말을 기억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해원의 머릿속에는 태헌의 말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
끝까지 있는 사람.
그날 밤,
해원이 잠들기 직전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얘기는 비밀.
해원이 웃었다.
누나 얘기?
응.
알았어.
잠시 후 태헌에게서 한 줄이 더 왔다.
사실 그게 제일 작은 얘기야.
해원의 손이 멈췄다.
그럼 큰 얘기는 뭔데?
읽음.
역시 답이 없었다.
해원이 기다렸다.
1분.
5분.
10분.
그리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왜 결혼을 안 했는지.
해원이 눈을 크게 떴다.
태헌의 메시지가 하나 더 이어졌다.
그리고 왜 네가 이혼했냐고 자꾸 물어봤는지.
해원은 그대로 굳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한참 뒤에 왔다.
그건 아직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태헌이 숨기고 있는 가장 큰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마음이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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