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시간 돼.
14화. 참 좋은 타이밍
해원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태헌에게서 온 마지막 문장은 별것 아닌 듯 짧았다.
“너, 언제 시간 돼?”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언제 시간 돼.
같이 가자는 말도 아니었고, 보고 싶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서연에게는 그 말이 다른 뜻처럼 들렸다.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언제야.
내가 그날에 맞춰볼게.
그렇게.
해원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왜? 나 보고 싶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아 지웠다.
‘시간은 만들면 되지.’
괜히 기다렸다는 사람 같아서 또 지웠다.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거실을 둘러봤다.
갑자기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째 열어보지 않은 상자.
언젠가는 입을 거라며 남겨둔 옷.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라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
해원은 문득 웃었다.
사람은 참 이상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버리지 못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커다란 쓰레기봉투 하나를 펼쳤다.
“그래. 좀 버리자.”
옷장에서 오래된 옷을 꺼냈다.
하나를 버리고 나니 두 번째는 쉬웠다.
두 번째를 버리고 나니 세 번째는 더 쉬웠다.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인지도 몰랐다.
한때의 자신.
참았던 시간.
언젠가 좋아질 거라 믿었던 마음.
해원은 옷 하나를 들고 한참 바라보다가 봉투 안에 넣었다.
툭.
이상하게 가슴이 시원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뭐 해?”
“대청소.”
“갑자기?”
“가벼워지려고.”
잠시 답이 없었다.
해원은 괜히 덧붙였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으면 어디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곧 답장이 왔다.
“그럼 다 버려.”
“뭘 다 버려.”
“필요 없는 거.”
해원은 피식 웃었다.
“너도?”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
그리고 도착한 문장은 짧았다.
“나는 필요한 쪽 아니냐?”
해원의 손이 멈췄다.
“뭐래.”
그렇게 보내고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남자는 늘 이랬다.
한 발 가까이 오는 것 같으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멀어지고, 이제 별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 한마디가 사람 마음을 하루 종일 붙잡았다.
태헌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제주 집 어디라고 했지?”
“표선.”
“나도 빌려주라.”
해원은 소리 내 웃었다.
“연세.”
“친구끼리 뭘.”
“너 돈 많다며.”
“그건 네가 소문냈잖아.”
해원은 웃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친구.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썼다.
친구끼리.
이상했다.
분명 편한 말인데, 해원은 그 단어가 조금 서운했다.
자신이 태헌에게 무엇이길 바랐던 걸까.
친구보다 조금 더?
아니면 아주 많이 더?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서연아.”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
“근데 네가 있을 때 가야지.”
심장이 아주 조금 빨리 뛰었다.
해원은 한참 후에야 답했다.
“왜?”
“집주인이 있어야 편하지.”
“그게 다야?”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해원은 곧바로 후회했다.
괜히 물었다.
취소하고 싶었지만 이미 숫자 1이 사라졌다.
읽었다.
태헌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1분.
3분.
5분.
괜히 물어봤나.
해원이 휴대전화를 엎어놓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해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얄미운 남자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었다.
초가을 바람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리하다 만 옷가지가 바닥에 널려 있었고 커다란 봉투 두 개는 벌써 가득 찼다.
이상하게도 집이 넓어진 것 같았다.
아니.
집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빈자리가 생긴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지는 아직 몰랐다.
여행일 수도 있었다.
낯선 풍경일 수도 있었다.
혹은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해원은 문득 카라반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헌이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조금 부러웠다.
집을 통째로 끌고 다니는 것 같은 여행.
마음에 드는 곳에서 멈추고, 아침이면 문을 열어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나는 생활.
“카라반 여행은 재미있어?”
해원이 물었다.
태헌의 답은 금방 왔다.
“편해.”
“나는 제주 갈 때 핸드백만 가지고 가도 편해.”
“헐.”
“왜?”
“너는 진짜 몸만 다니는구나.”
“제주 집에 다 있는데 뭘 들고 가.”
잠시 후 태헌이 물었다.
“그럼 팬티도 안 가져가냐?”
해원은 화면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바보야!!!”
“ㅋㅋㅋ”
“다 있거든.”
“제주 집 진짜 궁금하네.”
“궁금하면 와.”
보내고 나서 해원은 멈칫했다.
이번에는 지울 수도 없었다.
태헌이 바로 읽어버렸다.
그런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해원은 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정리나 하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진동이 울렸다.
“진짜 가도 돼?”
이번에는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해원은 화면을 바라봤다.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늘 말이 먼저였다.
농담.
장난.
떠보기.
슬쩍 던지는 관심.
그러나 실제로 한 발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이 거실 바닥까지 길게 들어와 있었다.
살다 보면 이상하게 모든 것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집을 정리하고 싶어지고.
누군가의 여행이 부러워지고.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묻는다.
진짜 가도 돼?
해원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응.”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 줄을 더 붙였다.
“대신 혼자 와.”
전송.
이번에는 태헌의 답장이 늦었다.
해원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화면이 켜졌다.
“왜?”
해원은 웃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적었다.
“그래야 집이 안 좁지.”
보냈다.
거짓말이었다.
제주 집은 두 사람이 머문다고 좁아질 집이 아니었다.
태헌도 그걸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참 뒤 답장은 단 한 줄이었다.
“알았어.”
그날 해원은 오래된 여행가방 하나를 꺼냈다.
아직 어디에도 갈 계획은 없었다.
날짜도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방을 닦아두고 싶었다.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떠날 수 있는 준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인지 아닌지 미리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문 하나쯤 열어두는 것.
들어오라고 잡아끌지는 않되, 들어오는 사람을 굳이 밀어내지도 않는 것.
해원은 깨끗해진 거실 한가운데 서서 혼잣말했다.
“참 좋은 타이밍이네.”
그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태헌이었다.
“해원아.”
“왜?”
이번에는 한참 동안 다음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화면 위에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또 사라졌다.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 문장이 도착했다.
“제주 말고, 그전에 한번 볼래?”
해원의 손끝이 멈췄다.
이건 여행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주 집 이야기도 아니었다.
카라반 이야기도 아니었다.
해원은 그제야 알았다.
어쩌면 두 사람이 떠나려고 했던 곳은 제주가 아니라
서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운 곳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해원은 웃으며 답장을 썼다.
“언제?”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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