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다고 하면 만나줄까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1화
돈 많다고 하면 만나줄까
해원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검색창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강태헌.
그리고 그 아래,
최대주주.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래서 사진을 찾았다.
사진은 많지 않았다.
몇 년 전 경제 기사 한쪽에 실린 작은 얼굴.
확대했다.
분명 강태헌이었다.
늘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달라며 투덜거리던 남자.
중고거래 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었다고 잔소리하던 남자.
여자 좀 소개해달라며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귀찮게 하던 남자.
그런데 기사 속 강태헌은 달랐다.
정장을 입고 있었다.
표정도 달랐다.
그의 이름 뒤에는 해원이 제대로 읽기도 어려운 회사들과 지분 이야기가 이어졌다.
해원은 천천히 화면을 내렸다.
그러다가 멈췄다.
“뭐야…”
이 정도면 단순히 먹고살 정도가 아니었다.
해원은 순간 화가 났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왜 숨겼지?
자신은 그에게 꽤 많은 것을 말했다.
돈 때문에 힘들었던 날도.
일을 여러 개 해야 했던 이유도.
나이가 들어 다시 무언가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도.
가족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기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는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태헌은?
작은 회사.
그냥 장사 좀 했다.
먹고살 정도.
해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먹고살 정도?”
도대체 뭘 먹고살기에 저게 먹고살 정도란 말인가.
당장 전화하고 싶었다.
그러다 시간을 봤다.
새벽 두 시 십칠 분.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메시지를 썼다.
너 거짓말 쟁이지?
쓰고 지웠다.
강태헌 너 뭐야?
또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했다.
“내일 보자.”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다음 날 아침,
태헌에게 먼저 메시지가 왔다.
굿모닝.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한마디.
해원은 읽고도 답하지 않았다.
십 분 뒤.
삐쳤어?
답하지 않았다.
다시 십 분.
일본어 선생님 오늘 휴강?
해원은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그런데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 결국 받았다.
“왜.”
태헌이 웃었다.
“화났네.”
“안 났어.”
“네가 ‘왜’라고 할 때 목소리 낮으면 화난 거야.”
“강태헌.”
“응.”
“오늘 시간 돼?”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왜.”
“보자.”
“무슨 일인데.”
“보면 알아.”
잠시 침묵.
태헌이 말했다.
“몇 시.”
두 사람은 오후 세 시에 만났다.
지난번 일본어 공부를 했던 카페였다.
태헌은 먼저 와 있었다.
해원이 자리에 앉자 그가 웃었다.
“무섭게 왜 그래.”
해원은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화면을 돌려 태헌에게 보여줬다.
기사였다.
태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거 뭐야.”
태헌은 화면을 한 번 보고, 다시 해원을 봤다.
“검색했어?”
“응.”
“왜.”
그 한마디에 해원이 더 화가 났다.
“왜?”
“응.”
“궁금하니까 했지.”
태헌이 커피잔을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알고 싶은데.”
해원은 어이가 없었다.
“너 내가 알던 강태헌 맞아?”
태헌이 피식 웃었다.
“사람이 바뀌냐?”
“장난하지 마.”
웃음이 사라졌다.
해원이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너 회사 작다며.”
“내 기준에 작아.”
“먹고살 정도라며.”
“먹고살잖아.”
“강태헌!”
몇몇 사람이 돌아봤다.
해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나 갖고 놀았어?”
그 순간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하지 말랬지.”
“그럼 뭐야.”
“내가 돈 있다고 왜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해원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굳이 말할 의무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운했다.
“나는…”
해원이 말을 멈췄다.
“너한테 꽤 많은 얘기 했잖아.”
태헌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알아.”
“힘든 얘기도 했고.”
“알아.”
“돈 때문에 죽도록 일한다고도 했고.”
“그래.”
“그런데 넌 옆에서 다 들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태헌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말하면?”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내가 사실 돈 많아. 회사도 꽤 크고, 가지고 있는 것도 많아.”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덜 힘들어?”
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돈 좀 줄까?”
“야.”
“그랬으면 네가 받아?”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태헌은 해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니까.”
태헌이 말했다.
“네가 힘들 때 내가 돈 얘기하는 게 더 싫었어.”
해원이 시선을 내렸다.
화를 내러 왔는데, 이상하게 할 말이 없어졌다.
태헌이 한참 뒤 말했다.
“그리고…”
“뭐.”
“나는 네가 나를 그냥 강태헌으로 보는 게 좋았어.”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태헌이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
“뭘.”
“내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
태헌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만날 때부터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걸 봐.”
“…….”
“근데 넌 아니잖아.”
해원의 가슴이 묘하게 움직였다.
“너는 처음부터 나한테 재수 없다고 했잖아.”
해원이 피식 웃었다.
“지금도 재수 없어.”
태헌도 웃었다.
팽팽했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그런데 해원에게는 아직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자를 계속 소개해달라고 하는 거야?”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네가 사람 못 믿으니까.”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이 계속했다.
“돈 때문에 접근하는 여자인지 아닌지 보고 싶은 거잖아.”
태헌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정답이었다.
잠시 후 해원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맞다.”
“뭐.”
“내가 소개해준다던 사람.”
태헌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왜.”
“말해봤어.”
“뭐래.”
해원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안 만난대.”
태헌이 몇 초 동안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잘렸네.”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태헌도 웃었다.
“사진은 봤대?”
“응.”
“내 사진 이상한 거 보낸 거 아니지?”
“멀쩡한 거.”
“근데 왜 싫대?”
해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나이가 걸렸나?”
“그럴 수도.”
태헌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돈 많다고 하지 그랬어.”
해원이 눈을 흘겼다.
“그걸 먼저 말하면 네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만 오겠지.”
태헌의 손이 멈췄다.
해원이 웃었다.
“맞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피식 웃었다.
“나 이번 생은 혼자 살 팔자인가 보다.”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데 해원은 웃지 못했다.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그러게, 성격을 고쳐.
조건을 좀 낮춰.
여자 좀 그만 시험해.
그렇게 놀렸을 텐데.
오늘은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외로움.
태헌이라는 남자는 가진 것이 많았다.
혼자 몇 달씩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고, 일하지 않아도 회사가 굴러갔으며,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같이 밥 먹을 사람 하나를 고르지 못했다.
해원이 문득 물었다.
“외로워?”
태헌이 웃었다.
“갑자기?”
“그냥.”
“안 외로워 보이냐?”
“응.”
“왜.”
“맨날 잘 놀러 다니잖아.”
태헌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안 외로운 건 아니야.”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태헌이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이제는 같이 다닐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그 목소리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여행 가면 같은 거 보고, 밥 먹으면 맛있는 거 같이 먹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플 때 병원 가라고 잔소리해 주는 사람도 있고.”
해원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말은 이상하게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태헌이 웃었다.
“그러니까 여자 좀 잘 찾아봐.”
해원은 어이가 없어졌다.
“또?”
“응.”
“방금 분위기 다 깨졌어.”
“무슨 분위기.”
“됐어.”
해원이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이상했다.
이 남자의 여자를 찾아주는 일이
왜 점점 싫어지는 걸까.
카페를 나서기 전, 태헌이 갑자기 말했다.
“나 다음 달에 또 나가.”
“어디.”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넘어갈 거야.”
“또?”
“응.”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일정을 보여줬다.
하노이.
닌빈.
사파.
라오까이.
허커우.
쿤밍.
시솽반나.
해원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15일?”
“대충.”
“부럽다.”
“같이 갈래?”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태헌의 표정은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미쳤어?”
“왜.”
“내가 너랑 왜 가.”
“친구니까.”
해원은 피식 웃었다.
“여자 소개받아서 같이 가.”
태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그러든가.”
해원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원은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보다
태헌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났다.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안 외로운 건 아니야.
그 남자는 돈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고, 떠날 자유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 하나는 없었다.
해원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건 아닐까.
사람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 놓고 기대는 사람 하나 없는 삶.
그때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집 가?
응.
잠시 뒤.
아까 화난 거 풀렸어?
해원은 잠깐 생각했다.
반쯤.
왜 반이야.
아직 숨긴 거 많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답장이 늦었다.
그리고 한 줄.
많아.
해원의 눈이 커졌다.
뭔데?
읽음.
답이 없었다.
한참 뒤 메시지가 왔다.
천천히 알려줄게.
해원은 웃었다.
뭘 그렇게 대단한 걸 숨기냐.
태헌의 답은 이번에는 바로 왔다.
돈 말고.
해원의 손이 멈췄다.
그 아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내 얘기.
그리고 마지막.
네가 도망가지 않을 만큼씩만.
해원은 길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도망가지 않을 만큼.
그 말이
그날 알게 된 수많은 숫자보다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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