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왜 여자를 소개해달래

뭘 참는다는 거야.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9화
그러면서 왜 여자를 소개해달래

나도 참는 중이니까.

해원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글자는 그대로인데
읽을 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뭘 참는다는 거야.

연락하는 걸?

말하는 걸?

아니면.

해원은 마지막 생각까지 가지 않고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미쳤어, 윤해원.”

쉰을 훌쩍 넘긴 여자가
문자 한 줄 가지고 밤새 뒤척였다.

그것도 남편도,
애인도 아닌 남자 때문에.

정확히는 남사친.

아주 오래된 남사친.

해원은 일부러 태헌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하나 보자.

그런데 오전 열 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었다.

열한 시.

없었다.

점심을 먹고도 없었다.

이쯤 되자 괜히 화가 났다.

자기가 사람 잠 못 자게 해 놓고
잘만 사나 보네.

해원은 청소기를 돌렸다.

평소보다 세게.

냉장고 정리도 했다.

서랍까지 닦았다.

그래도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광고 문자.

카드사.

택배.

강태헌은 없었다.

그리고 오후 두 시 십칠 분.

드디어 메시지가 왔다.

해원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런데 내용을 읽는 순간
그대로 굳었다.

전에 말한 여자 있잖아.

해원의 눈썹이 모였다.

누구?

영어 잘한다던 사람.

해원은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설마.

태헌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소개해준다며.

어젯밤에는

나도 참는 중이니까.

그래놓고 오늘은

여자 소개해달라고?

해원은 기가 막혔다.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결국 가장 짧게 보냈다.

왜?

곧 답이 왔다.

뭐가 왜야.
결혼해야지.

해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인간은 정말 연구 대상이었다.

어제 나한테 한 말은?

읽음.

답이 없었다.

해원은 기다렸다.

1분.

2분.

3분.

마침내 답장이 왔다.

무슨 말?

“이 미친놈이.”

해원이 소리 내 말했다.

기억 안 나?

뭐.

나도 참는 중이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

해원은 묘하게 긴장됐다.

그리고 도착한 답.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상관없어?

응.

정말?

응.

좋아.

해원은 이를 악물며 썼다.

그럼 소개해줄게.

곧바로 답이 왔다.

그래.

해원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그래?”

왜 이렇게 열이 받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뭘 기대했다고.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었다.

자기는 분명 남편이 있었고,
태헌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누굴 만나든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그날 저녁.

태헌은 혼자 차를 몰고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해가 넘어갈 무렵
산소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묘였다.

태헌은 꽃도 가져오지 않았다.

술도 없었다.

그저 한참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인사였다.

태헌에게 가족이라는 말은
따뜻한 단어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먼저 생긴 딸들이 있었다.

태헌과는 어머니가 달랐다.

어릴 때부터 누나들은 그를 동생이라기보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기 몫을 빼앗을 사람처럼 대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는 더 노골적이었다.

회사.

땅.

건물.

지분.

모든 말의 마지막은 돈이었다.

누구도 태헌에게 묻지 않았다.

넌 괜찮니.

힘들지 않니.

혼자 남아서 어떻게 살 거니.

대신 물었다.

그래서 그건 누구 앞으로 할 거야?

태헌은 그때 배웠다.

핏줄이라고 모두 가족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돈은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데
생각보다 잔인할 만큼 정확한 도구라는 것을.

휴대전화가 울렸다.

큰누나였다.

태헌은 받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왔다.

명절인데 얼굴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니니?

태헌은 한참 보다가 화면을 껐다.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같은 아버지를 가졌을 뿐이었다.

잠시 후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윤해원.

소개할 사람한테 물어봤어.
사진 필요해?

태헌의 시선이 멈췄다.

해원은 정말로 소개를 진행하고 있었다.

태헌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부탁해 놓고

기분이 더러웠다.

사진은 됐어.

보내고 나서 다시 화면을 봤다.

몇 초 뒤 해원이 답했다.

왜?
예쁜데.

태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가 더 예뻐.

쓰고 나서 멈췄다.

한참 바라보다 전부 지웠다.

대신 보냈다.

성격은?

해원에게 답이 왔다.

착해.
영어 잘하고 여행 좋아하고.
네 조건에 얼추 맞아.

태헌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조건에 맞는다.

그게 뭐라고.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예쁜 여자.

젊은 여자.

능력 있는 여자.

외국어를 잘하는 여자.

집안 좋은 여자.

자신에게 적극적인 여자.

조건만 보면 부족할 게 없었다.

그런데 늘 어느 순간 마음이 닫혔다.

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달라지는 눈.

식당 직원에게 던지는 말투.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

조금씩 드러나는 거짓말.

태헌은 그런 작은 것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를 까다롭다고 했다.

누군가는 사람을 너무 시험한다고 했다.

맞았다.

태헌은 사람을 시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잘못 고른 단 한 사람이
자신의 남은 인생뿐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까지 가져갈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런데 윤해원은

시험할 수가 없었다.

시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애초에
자신의 돈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다.

태헌은 산소 앞에 앉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버지.”

잠시 침묵.

“나 이상한 여자 하나 알아.”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돈 없다고 맨날 일하면서
내 돈에는 관심도 없어.”

바람이 지나갔다.

태헌은 고개를 숙였다.

“근데 남의 여자야.”

그 말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태헌은 기다려야 했다.

해원이 자유로운 사람이 될 때까지.

그전에 마음을 말하면 안 됐다.

해원을 흔드는 것도,
선택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다.

그게 자신이 정한 선이었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만나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웃긴 것은

누굴 만나도 결국 해원과 비교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해원에게 전화가 왔다.

태헌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받았다.

“왜.”

해원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소개받을 거야, 말 거야?”

태헌이 웃었다.

“왜 화났어?”

“내가 언제.”

“목소리가 화났는데.”

“안 났거든.”

“삐쳤네.”

“내가 몇 살인데 삐치냐?”

태헌이 웃었다.

자기가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소개해줘.”

“알았어.”

“근데.”

“왜.”

태헌이 잠시 머뭇거렸다.

“너도 같이 나와.”

해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왜?”

“네가 소개하는 사람이잖아.”

“둘이 만나.”

“싫어.”

“뭐가 싫어?”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야, 강태헌.”

“어.”

“너 여자 만나려고 하는 거 맞아?”

태헌은 웃었다.

“왜.”

“이상하잖아.”

“뭐가.”

“나한테 소개해달라 하고,
막상 소개하면 내가 같이 나오라 하고.”

태헌은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해원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뭐.”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말했다.

“너 나한테 이상한 말 하잖아.”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

“남의 여자라느니,
참고 있다느니.”

정적.

“그래놓고 다음 날 여자 소개해달라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이해해?”

태헌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이 먼저 말했다.

“너 나 갖고 노는 거야?”

그 한마디에

태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윤해원.”

목소리도 달라졌다.

“응.”

“그 말은 하지 마.”

해원이 당황했다.

“왜.”

“나는 사람 갖고 안 놀아.”

“그럼 설명해.”

태헌은 눈을 감았다.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말하는 순간
자신이 정한 선을 넘는다.

“지금은 못 해.”

“또 그 말.”

“미안.”

처음이었다.

강태헌이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헌이 아주 낮게 말했다.

“대신 하나는 말할 수 있어.”

“뭔데.”

“네가 싫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야.”

해원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게 무슨…”

태헌이 말을 끊었다.

“여기까지.”

“야.”

“더 말하면 안 돼.”

“누가 정했는데?”

태헌은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왜?”

이번에는 태헌이 웃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전화가 끊겼다.

해원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 말을 알아듣고 싶은 걸까.

그날 오후.

해원은 소개하려던 여자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사진 봤는데 괜찮더라.
한번 만나볼게.

해원은 메시지를 한참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가 싫었다.

강태헌에게 그 말을 전하면

정말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무언가가.

해원은 처음으로 인정했다.

정호가 아니라,

강태헌이라는 남자를

친구에게 소개해주는 일이

생각보다 싫다는 것을.

그때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소개 건은 취소해.

해원의 눈이 커졌다.

왜?

답은 바로 왔다.

마음 바뀌었어.

해원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또?

이번에는 한참 답이 없었다.

그러다 한 줄이 왔다.

당분간 여자 안 만날래.

왜?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보냈다.

너 다음 촬영 언제야?

해원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남자의 모순이

조금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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