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질문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8화
내가 모르는 윤해원
“남자야?”
태헌에게서 온 메시지를 본 순간
해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남사친은 질투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상대역이라는 말 한마디에
첫 질문이 저거다.
해원은 일부러 바로 답하지 않았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냉장고에서 물까지 꺼내 마신 뒤에야
휴대전화를 들었다.
응.
딱 한 글자.
읽음 표시는 바로 떴다.
그런데 답은 없었다.
해원이 침대에 누웠다.
“웃기고 있네.”
분명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7분 뒤.
몇 살인데.
해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몰라.
잘생겼어?
이번에는 정말 웃음이 터졌다.
아직 못 봤어.
사진 없어?
왜 네가 궁금한데?
이번에도 읽음.
침묵.
해원은 휴대전화를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강태헌이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고 했을 때
자신도 조금은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것을 질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오래된 친구가
낯선 여자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서운함.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태헌은 달랐다.
그리고 더 문제인 건,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촬영 날은 사흘 뒤였다.
서울 외곽의 작은 스튜디오.
해원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정리하고
의상까지 갈아입자
거울 속에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아이보리색 니트.
부드러운 베이지색 치마.
그런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훨씬 여자 같아 보였다.
해원은 거울 속 자신을 한참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메이크업 실장이 물었다.
“네.”
“긴장되세요?”
해원이 웃었다.
“많이요.”
“그렇게 안 보여요.”
그 말이 조금 힘이 됐다.
촬영장으로 나오자
최준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네요.”
“네.”
준서의 시선이 해원에게 잠시 머물렀다.
“오늘 분위기 정말 좋으신데요?”
해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메이크업 덕분이죠.”
“아니요.”
준서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가지고 계신 분위기예요.”
그때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제 상대역이에요?”
해원이 돌아봤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오십 대 초반쯤.
키가 크고,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안녕하세요. 이재민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윤해원이에요.”
두 사람이 악수했다.
“처음 촬영이라고 들었어요.”
“티 나죠?”
“전혀요.”
재민이 웃었다.
“제가 더 긴장해야겠는데요.”
말투가 편안했다.
해원도 금방 긴장이 풀렸다.
첫 장면은
부부가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두 분 너무 연기하려고 하지 마세요.”
감독이 말했다.
“오래 같이 산 부부처럼 그냥 편하게.”
해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래 같이 산 부부.
그게 제일 어려운데.
카메라가 돌았다.
재민이 찻잔을 해원 쪽으로 밀었다.
“당신 거.”
대사 한마디.
해원은 잔을 받으며 웃었다.
“고마워.”
“컷.”
감독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해원의 심장이 철렁했다.
뭔가 잘못했나.
그런데 감독이 말했다.
“좋아요.”
정말?
“윤해원 씨.”
“네.”
“방금 웃는 거 좋았어요.
다시 한번만 갈게요.”
두 번째.
세 번째.
신기하게도 카메라가 돌아갈수록
해원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괜히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상대의 말을 듣고,
보고,
웃었다.
그러자 감독의 “좋아요”가 점점 많아졌다.
점심 무렵에는
처음보다 훨씬 편해졌다.
준서가 생수를 건넸다.
“제가 그랬죠.”
“뭘요?”
“현장부터 하셔도 된다고.”
해원이 웃었다.
“오늘 잘못하면 말 바꾸실 수도 있잖아요.”
“안 바꿀 것 같은데요.”
그때 이재민이 다가왔다.
“해원 씨.”
“네?”
“다음 장면 손잡는 거 아시죠?”
해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손이요?”
재민이 웃었다.
“부부인데 손도 안 잡으면 감독님이 화내죠.”
해원도 웃었다.
“그러네요.”
그 순간,
스튜디오 입구 쪽에서
누군가 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태헌이었다.
태헌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에 해원이 보낸 메시지는 단순했다.
오늘 촬영.
그게 전부였다.
태헌은 오전 미팅을 끝내고
점심 약속까지 취소했다.
그리고 운전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해원이 있다는 스튜디오 앞이었다.
그냥 잠깐 보려고 했다.
잘하고 있는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발이 멈췄다.
조명 아래 해원이 있었다.
자신이 알던 윤해원과 달랐다.
머리를 대충 묶고
편한 옷을 입은 채
자기한테 미친놈이라고 말하던 여자가 아니었다.
한 남자 앞에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태헌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더 정확하게는,
기분이 나빴다.
“손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잡아주세요.”
감독의 말이 들렸다.
상대 남자가 해원의 손을 잡았다.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해원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곧 웃었다.
“좋습니다!”
감독이 외쳤다.
“두 분 진짜 부부 같아요.”
태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부 같은 건 무슨.
그때 최준서가 태헌을 발견했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태헌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윤해원 씨요.”
“아.”
준서가 웃었다.
“해원 씨 지인이시군요.”
지인.
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입니다.”
“아, 그분이시구나.”
태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분?”
준서가 웃었다.
“해원 씨 휴대전화에 자주 연락하시던 분.”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마음에 들었다.
아주 조금.
촬영이 끝나자
해원은 그제야 태헌을 발견했다.
눈이 커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근처.”
“또 근처?”
태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잘하나 보러 왔지.”
“언제부터 있었어?”
“조금.”
“전화하지.”
태헌은 해원 뒤쪽을 바라봤다.
이재민이 스태프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상대역?”
해원이 웃었다.
역시.
“응.”
“몇 살이야?”
“또 시작이네.”
“물어볼 수도 있지.”
“네가 왜?”
그때 재민이 다가왔다.
“해원 씨.”
태헌의 시선이 바로 그에게 향했다.
재민이 말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재민 씨도요.”
“다음 촬영 잡히면 또 봬요.”
“네.”
재민은 잠깐 태헌을 바라봤다.
해원이 소개했다.
“제 오래된 친구예요. 강태헌.”
친구.
태헌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재민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재민입니다.”
태헌도 손을 잡았다.
“강태헌입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봤다.
해원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준서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며
작게 웃었다.
스튜디오를 나오자 태헌이 말했다.
“밥 먹자.”
“나 스태프들이랑 먹기로 했는데.”
태헌의 걸음이 멈췄다.
“아까 그 남자도?”
해원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야.”
“왜.”
“너 진짜 왜 그래?”
“뭘.”
“신경 쓰이잖아.”
“안 쓰여.”
“그럼 그냥 가.”
태헌이 입을 다물었다.
해원은 가방을 고쳐 멨다.
그리고 일부러 말했다.
“재민 씨 괜찮더라.”
태헌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뭐가.”
“사람이 편해.”
“오늘 처음 봤잖아.”
“처음 봐도 편한 사람이 있지.”
“사람 그렇게 빨리 판단하지 말라며.”
해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네가 나한테 한 말인데?”
태헌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해원이 웃었다.
“내 가치관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왜 네가 후퇴하냐?”
태헌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윤해원.”
“왜.”
“재밌냐?”
“응.”
“사람 약 올리는 거?”
“너한테 배웠지.”
그 말에 태헌도 결국 웃었다.
잠시 둘 사이에
예전 같은 편안함이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스튜디오 안에서 이재민이 나왔다.
“해원 씨.”
해원이 돌아봤다.
“네?”
재민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제가 번호를 못 받았네요.”
태헌의 웃음이 사라졌다.
“촬영 때문에요?”
“촬영도 그렇고.”
재민은 잠시 웃었다.
“나중에 차라도 한잔하죠.”
해원이 대답하려는 순간,
태헌이 먼저 말했다.
“연락은 회사 통해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해원이 천천히 태헌을 바라봤다.
“야.”
재민은 태헌을 한번 보고
해원을 다시 봤다.
“혹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다.
“남자친구세요?”
해원은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너무 빨랐다.
태헌의 눈빛이 굳었다.
해원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오래된 친구예요.”
그냥.
오래된.
친구.
태헌은 그 세 단어를 조용히 삼켰다.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번호 주셔도 괜찮겠네요.”
해원이 자기 번호를 불렀다.
태헌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차 안.
평소와 달리 태헌은 조용했다.
해원은 몇 번이나 옆을 바라봤다.
“삐쳤어?”
“아니.”
“삐쳤네.”
“운전 중이야.”
“네가 한 살 어리다고 이럴 때 티 난다.”
태헌이 헛웃음을 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뭐야?”
해원의 장난기가 멈췄다.
“뭐?”
“네가 아까 그랬잖아.”
태헌은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그냥 오래된 친구.”
“맞잖아.”
“그래.”
또 침묵.
해원이 물었다.
“그럼 뭐라고 소개해?”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해원이 웃었다.
“설마 남편이라고 해?”
태헌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네가 아직 있어서 못 하지.”
해원의 웃음이 사라졌다.
“뭐?”
태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강태헌.”
“응.”
“방금 무슨 뜻이야?”
“그냥 가만히 있어.”
“또 도망가네.”
태헌은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해원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윤해원.”
“왜.”
“내가 네가 이혼했냐고 왜 계속 물어보는지.”
해원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태헌이 말했다.
“진짜 몰라?”
그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태헌은 다시 앞을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해원은 더 묻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처음으로
그 질문의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해원에게 이재민의 메시지가 왔다.
오늘 촬영 즐거웠어요.
다음엔 카메라 없이 봐요.
해원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태헌에게도 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갔어?
해원은 두 대화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한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났고,
한 남자는 아주 오래 알고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보다
오래 알고 지낸 남자가
훨씬 더 낯설었다.
해원은 이재민의 메시지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헌에게 먼저 물었다.
너 아까 말한 거.
곧 읽음 표시가 떴다.
해원이 이어서 적었다.
왜 내가 이혼했는지가 그렇게 궁금한데?
이번에는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10분.
20분.
30분.
해원은 결국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태헌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왔다.
네가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날까지는
말하면 안 되는 거라서.
해원은 숨을 멈췄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묻지 마.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나도 참는 중이니까.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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