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망쳐버렸어요

서로의 상처

by양다경

그날 이후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흘렀다.

철규는 이층 방에서 본 사실을 인희에게 말해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했다.

'오늘은 진짜 말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결심했다.

'퇴근하면 반드시.'

회사에 가서도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철규의 단단했던 결심은 마치 배터리 1%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왔어요? 밥 차릴게요."

평소와 다름없는 인희의 목소리.

철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희야. 우리 사이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어.'

머릿속에서는 이미 드라마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나온 말은….

"김치 맛있네. 맛들었어."

잠시 정적.

철규는 젓가락을 든 채 멈췄다.

'뭐 하는 거야, 철규야. 지금 김치 심사위원으로 온 거야?'

그날도 결국 진실은 김치와 함께 밥상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작은 의심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마음속에서 덩치를 키우더니, 어느새 철규 혼자 들 수 없는 대형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밤만 되면 이층 방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컴퓨터 화면 속 낯선 이름.

자신이 몰랐던 인희의 시간.

철규는 옆에서 곤히 자는 인희를 바라봤다.

'잠깐만…. 내가 지금 질투하는 대상이 누구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학생인가?'

아니었다.

'아내가 나 몰래 더 많이 웃었다는 사실인가?'

그게 더 아팠다.

철규는 천장을 바라봤다.

회사에서는 직원들 앞에서 목소리도 크게 내고, 회의 때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아내 앞에서는 입이 자동으로 잠기는지.

마치 회사 발표 자료는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정작 발표 날 자료를 집에 놓고 온 사람 같았다.

철규는 한숨을 쉬었다.

"나 참… 회사보다 집이 더 어렵네."

그리고 다시 연습했다.

"인희야.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

좋다.

이번엔 완벽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래."

이것도 괜찮았다.

그런데 머릿속 인희가 대답했다.

"그래서요?"

철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지?'

결국 그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회사에서는 과장이고, 집에서는 말문 막힌 남편.

철규는 그날도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면접관은 상사가 아니라 아내라는 것을.

화부터 낸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왜 이렇게 멀어졌는지, 그 이유를 마주 보는 일이었다.

철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은 반드시 말한다.'

이번에는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그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어쩌면 이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마지막 끈을 붙잡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비장한 마음으로 그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집에 도착한 순간,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왔어요? 얼른 씻고 밥 먹어요."

인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철규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내가 지금 이렇게 심각한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가지 의심과 질문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인희는 된장찌개 간을 보느라 바빴다.

"찌개 좀 식기 전에 먹어요."

그 말에 철규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저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너무 태연한 건가.'

그는 인희를 몰래 바라보았다.

수십 년 동안 함께 산 아내였다.

아침이면 같은 식탁에 앉았고, 밤이면 같은 방에서 잠들었던 사람.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낯설게 느껴졌다.

철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인희가 말했다.

"왜요? 밥에 뭐 들어갔어요?"

철규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지금 밥 검사를 하러 온 게 아닌데…'

그는 수저를 들었다.

오늘 밝혀야 할 것은 된장찌개의 비밀이 아니라, 인희 마음속에 숨겨진 이야기였다.

수저를 들었지만 음식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씹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철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의 대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반드시 묻는다.'라는

그의 결심은 유효했다.

하지만 현실의 철규는 아주 평범하게 밥을 씹고 있었다.

아무 일도 모르는 인희는 맞은편에서 말했다.

"왜 그렇게 밥을 오래 씹어요? 체했어요?"

철규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마음속으로는 인생 최대의 심문을 준비 중인데…'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아니. 그냥."

그는 겨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물컵을 내려놓았다.

마치 오래 준비한 기자회견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여보."

인희가 고개를 들었다.

"나 식사 끝나고 할 얘기 있으니까 오늘은 이층 방 가지 말고 있어 줘."

그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인희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응. 있어."

철규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멋진 대사를 준비해 두었다.

'당신의 모든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이상하게 목이 잠겼다.

그는 결국 말없이 거실 소파로 향했다.

잠시 후 앞치마를 벗은 인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요?"

철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형사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입이 안 떨어지는 거야. 연습할 때는 술술 나오더니.'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말이야."

"... 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인희의 얼굴이 굳었다.

철규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어쩌려고 이층 방에서 매일 고등학생인 척하면서 그 아이와 대화를 했어?"


순간이었다.

인희의 표정이 변했다.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철규가 몰랐던 것은 하나였다.

그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키운 의심의 크기와, 인희가 품고 있던 외로움의 크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긴 침묵 끝에 인희가 입을 열었다.

"외로워서 그랬어요."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사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당신은 늘 바빴고… 그냥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말은 철규의 마음을 쉽게 풀어주지 못했다.

그에게 먼저 보인 것은 외로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숨겨온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속였다는 거야?"

철규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장 솔직히 말해. 당신이 누군지, 그 아이에게 말해야 해."

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 고등학생 아니라고. 사십 대 주부라고. 그동안 거짓말했다고 직접 말해. 사과도 해야지."

철규는 단호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평생 아내와 싸워본 적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법정 검사라도 된 것처럼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인희는 눈물을 훔쳤다.

"여보… 제발."

"왜?"

"정말 끝냈어요. 이제 안 하려고요."

그 말에 철규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수십 편의 추리극을 찍고 있던 터였다.

'끝냈다? 그럼 그전 거는?'

혼자 상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철규가 낮게 말했다.

"나 몰래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인희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기는 했어요?"

그 한마디에 철규의 입이 닫혔다.

사실이었다.

철규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규는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거짓말은 잘못이야."

"알아요."

인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끝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철규는 한숨을 쉬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컴퓨터 켜. 내가 직접 확인할게."

인희의 눈이 커졌다.

"여보, 잠깐만요."

"비켜."

"싫어요."

인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철규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지금 이게 부부 싸움이지 팔씨름 대회가 아닌데.'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물러설 수 없었다.

철규는 팔을 빼려 했고, 인희는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러다 오래된 셔츠가 문제를 일으켰다.

"쫘악."

두 사람 모두 멈췄다.

철규는 찢어진 소매를 바라봤다.

인희도 바라봤다.

잠시 정적.

"……그 셔츠 오래 입긴 했죠."

인희가 작게 말했다.

철규는 허망한 표정으로 셔츠를 쳐다봤다.

"지금 셔츠 걱정할 때예요?"

"아니… 그냥."

평소 같으면 웃었을 사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다짐했지만, 막상 진실 앞에 서자 두 사람 모두 물러서지 못했다.

철규는 다시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보, 잠깐만요."

인희가 뒤따라왔다.

철규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알아야 해."

그 말에 인희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제발… 조금만 기다려 줘요."

철규는 팔을 빼려 했다.

"인희야, 나도 힘들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누구도 상대를 이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참아온 마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철규의 소매를 붙잡고 있던 인희의 손끝에 힘이 빠졌다.

"어?"

순간, 인희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철규는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마음을 붙잡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이, 이제는 서로를 붙잡을 수 없는 거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여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인희의 몸이 계단 밑으로 넘어갔다.

짧은 비명과 함께 계단을 구르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쿵.

쿵.

'으악!!'

그리고 고요.

철규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사람은 사라지고, 눈앞의 아내만 보였다.

"인희야…?"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철규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여보! 눈 떠봐!"

손끝이 떨렸다.

분노도, 의심도, 자존심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평생 함께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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