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는 관심
철규의 회사는 겉으로는 점잖은 척했지만, 안에서는 사바나처럼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장이라는 치타는 늘 먹잇감을 노렸고, 직원들은 그 레이더망을 벗어나기 위해 하루 종일 눈치를 살폈다.
철규도 가끔은 상상했다. 자신이 사바나의 왕 사자라면 저 치타를 단숨에 저 멀리 쫓아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의 그는 사자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물소였다.
'근데 사바나에 물소가 있었나?'
잠깐 엉뚱한 생각이 스쳤지만, 어쨌든 덩치만 컸지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풀이나 뜯는 동물. 그게 바로 철규였다.
부장 치타는 만년 과장인 철규를 월급만 축내는 물소쯤으로 여겼다. 이미 여러 번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물어뜯었지만, 철규는 쓰러지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 사실을 인정할 때마다 어깨는 저절로 처졌다.
그때 문득 시선을 돌리자 박 대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빠르게 승진한,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다만 유전적인 영향으로 부분 가발을 쓰고 있었다.
'오늘따라 한껏 멋을 냈네. 머리숱 없는 게 죄도 아닌데.'
그 순간이었다.
박 대리가 재채기를 크게 한 번 하자 가지런하던 가발이 얄궂게 사선으로 돌아가 버렸다.
철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저걸 어떡해. 빨리 알려줘야 하는데. 좋아하는 하영 씨라도 보면 얼마나 민망하겠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인희가 떠올랐다.
'아, 맞다.'
요즘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인희의 수상한 행동.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일찍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박 대리 일에 정신이 팔려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철규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이상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는 박 대리에게 다가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 대리님, 앞머리가… 조금 옆으로 비뚤어졌습니다."
박 대리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머리를 만졌다.
"아… 감사합니다!"
그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철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린 철규는 부장 앞으로 걸어갔다.
"부장님."
부장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그를 바라봤다.
"감기몸살이 온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조금만 일찍 퇴근하면 안 되겠습니까?"
철규는 일부러 힘없는 목소리로 사정을 했다.
부장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이 안 좋으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일찍 들어가."
철규의 표정이 조금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대신 내일은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는 것 좀 보여줘. 안건 하나는 제대로 준비해 오고."
역시 마지막 한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철규는 속으로만 입맛을 다셨다.
'한마디 안 하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나.'
예전 같았으면 억울한 마음이 먼저 들었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편이 빨랐다. 수없이 들어온 잔소리였다.
그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동료들에게 손을 한번 들어 보인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회사 건물을 나서자 먹구름이 하늘을 낮게 뒤덮고 있었다. 오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어두운 하늘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공기마저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철규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왠지 저 먹구름이 자신의 마음을 대신 드리운 것만 같았다.
그는 괜히 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집으로 돌아온 철규는 인희를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도대체 이층 방에서 뭘 하는 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곧장 올라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한동안 TV도 켜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씩 내디딜 때마다 괜히 심장이 더 크게 뛰는 것 같았다.
방 앞에 다다른 그는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예상대로 인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은 쉼 없이 키보드를 오갔고, 시선은 화면에 깊이 박혀 있었다.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와도 모를 만큼 몰입한 모습이었다.
철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괜히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인터넷 도박?'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희가 무엇을 하든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도박만큼은 달랐다. 한순간에 가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곧이어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걸지도 몰라.'
괜히 트집을 잡는 남편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민망함도 밀려왔다.
하지만 의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철규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일부러 발소리를 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인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철규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 해? 사람 오는 줄도 모르고."
"어머!"
인희는 몸을 흠칫 떨며 놀랐다. 한 손은 가슴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 손은 반사적으로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 모습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사람처럼 너무도 다급했다.
철규의 시선이 천천히 닫힌 모니터로 향했다.
“뭐예요? 진짜! 사람 놀래게!” 인희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뭔데 뭐 그렇게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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