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그녀의 기억
“흠…….”
인희는 깊은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마치 아주 긴 잠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미했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자, 인희는 낯선 병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그리고 한쪽에 서 있는 한 사람.
인희의 시선이 그 중년 남자에게 멈췄다.
그는 키가 175cm쯤 되는 듬직한 체구에 인상이 부드러운 남자였다.
얼핏 보면 짙은 눈썹과 선명한 이목구비가 배우 송승헌을 연상시킬 만큼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철규는 그대로 굳었다.
인희와 눈이 마주쳤다.
‘깨어났어!’
그 순간, 철규의 머릿속을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기쁨. 안도. 놀라움.
손에 들고 있던 안경조차 쓰지 못한 채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인…… 인희야?”
그토록 기다렸던 이름을 부르는데도 목소리가 마음처럼 나오지 않았다.
철규는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신,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
수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온 사람처럼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여보.’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텨왔던가.
하지만 인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철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겁을 먹은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저씨, 누구세요?”
철규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장난인가?’
평소 장난을 좋아하던 인희였다. 혹시 자신을 놀리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철규는 애써 웃었다.
“여보, 나야. 나 모르겠어?”
그러나 인희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두려움과 혼란만이 가득했다.
인희가 병실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예요?”
철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 나야. 철규. 그리고 여긴 병원이야.”
"병원?" 인희는 겁먹은 사람처럼 다시 두리번거렸다.
또 그저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철규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가 힘없이 무너졌다.
인희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알아보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서둘러 병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 간호사와 의사가 바삐 들어왔다.
의사는 인희에게 이름과 나이, 현재 장소 등을 차례로 물으며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대답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특히 철규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인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사를 마친 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재 기억에 혼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일 수도 있고, 정확한 원인은 조금 더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철규가 바로 물었다.
“기억이…… 돌아올 수 있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지금은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심한 스트레스로 특정 시기의 기억이 흐려진 경우니까요.”
“특정 시기…….”
철규는 그 말을 되뇌었다.
의사가 나간 뒤에도 그 말은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특정 시기.’
철규는 다시 인희를 바라봤다.
모든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 이후의 기억만 없었다.
아니, 자신과 함께 살아온 세월만 통째로 비어 있는 듯했다.
“인희야.” 철규는 최대한 낮게 상냥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인희가 그를 바라봤다.
철규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나, 철규야. 당신 남편.”
인희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정말 아저씨랑 결혼했어요?”
철규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아저씨.’
오늘 자신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였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자신을 남편이 아닌 낯선 사람으로 부르고 있었다.
검사 결과, 인희에게서 특별한 신체적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희는 퇴원한 뒤 정신의학과 외래 치료를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 순간, 철규의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 하나.
철규에게 진짜 문제는 병원 밖에 있었다.
바로, 집이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낯선 남자가 나타나
“여기가 당신 집이고, 내가 당신 남편이니 여기서 나와 함께 살아.”
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을 리 없었다.
철규는 한참을 고민했다.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강경준.
인희와 채팅을 나누던 학생이었다.
철규는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희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아이.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당시 인희는 자신을 고3 여학생이라고 속인 채, 경준과 채팅을 이어갔다.
왜 하필 고3 여학생이었을까.
처음부터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속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남았다.
왜 인희는 결혼 이후의 기억만 잃어버린 것일까.
철규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강경준이라는 이름이, 인희가 잃어버린 기억과 어딘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무엇이 그토록 간절했기에, 사라진 기억의 빈자리를 하필 ‘고3의 인희’가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철규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퍼즐을 맞춰보았다.
하지만 흩어진 조각들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때 문득 경준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희가 왜 갑자기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 버렸는지.
그동안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있었는지.
철규는 잠시 망설였다.
경준을 만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내의 시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키지 않았다.
불편했다.
솔직히 질투도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인희를 되찾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했다.
결국 철규는 마음을 굳혔다.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에 앞서, 먼저 경준을 만나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 아이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희가 고3 시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인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