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심경의 철규
응급실 침대에는 인희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그 곁을 지키는 철규의 얼굴은 마치 누구한테 얻어맞고 온 사람처럼 초췌했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를 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깨는 축 처졌고, 눈빛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의사는 인희의 동공도 확인하고 심장 소리도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아마 잠시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철규는 안도의 한숨을 쉬려다가도 곧바로 다시 긴장했다.
"그럼… 정말 괜찮은 거죠? 아니, 잠깐만요. 혹시 '괜찮은 것 같다'는 건 안 괜찮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의사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정확한 건 CT랑 MRI를 찍어봐야 합니다."
그 말 한마디에 철규는 다시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다더니 또 검사는 왜 이렇게 많아?'
몇 분 사이 그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쉼 없이 왕복하고 있었다.
철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철규야. 입이 문제다, 입이.'
조금 전까지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기세 좋게 계단을 올라가더니, 지금은 의자에 앉아 자기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다.
'조금만 참지…. 한 박자만 쉬고 말하지…. 왜 꼭 성질이 앞서냐.'
후회는 늘 사건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는 연신 자신의 이마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주 올해의 최고상, 욱한 남편상이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근데… 인희는 나를 얼마나 재미없는 남편으로 생각했던 거야?'
잘 나가던 시절엔 툭 던진 애드리브 하나로 사람들을 웃겨 전멸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위트는 자신 있었지만, 현재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괜히 찌르르한 철규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만 깨어나. 이번엔 진짜 말부터 들어주고, 화는 나중에 낼게. 아니… 화도 웬만하면 안 내고 재밌게도 해줄게.'
그는 스스로와 약속하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중얼거렸다.
'… 그래도 거짓말한 건 아니지 않나.'
혼낼지, 안아줄지, 사과할지, 사과받을지.
철규의 머릿속 회의는 끝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CT와 MRI 촬영이 끝난 뒤, 의사는 다행히 인희의 머리에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철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또 털썩 주저앉았다.
"살았다…."
누가 보면 환자가 철규인 줄 알 정도였다.
인희가 검사받는 내내 한숨도 못 잔 탓에 눈은 충혈됐고, 얼굴은 밤샘 시험공부라도 한 사람처럼 퀭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워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는 괜히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계단 앞에서 말싸움 금지. 화날 땐 심호흡 세 번. 아니, 다섯 번.'
그러다 무언가 혼자 결심하듯 입을 오므렸다.
'아니지. 그냥 화를 내지 말자. 내 성질머리부터 AS 받아야겠네.'
철규는 고개를 긁적이며 병실 쪽을 바라봤다.
인희가 눈만 뜨면 이번에는 따질 생각보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부터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부가 등을 맞대고 살면서도 서로 딴 세상 사람처럼 지내는 일만큼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살아만 있어. 잔소리는 천천히 해도 안 늦는다.'
철규는 그렇게 또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희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당신이 돌아올 곳은 집이잖아. 우리 집.'
괜히 미운 마음에 한마디 해주고 싶다가도, 침대에 누워 있는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고, 내가 사람을 괴롭힌 건지, 혼낸 건지.'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했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
그게 철규의 가슴을 꽉 막히게 만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외로웠길래….'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 아니, 나도 맨날 회사, 회사, 회사. 집에 오면 TV, 밥, 잠. 정말 대화가 없긴 없네.'
철규는 스스로를 향해 씁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철규야, 너도 참 답답하게 살았다.'
눈시울이 괜히 뜨거워졌다.
'당신만 깨어나 봐. 이번엔 내가 좀 달라져 볼게.'
그렇게 다짐해 놓고 그는 인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덧붙였다.
"…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채팅 말고 나랑 싸워. 싸우는 게 훨씬 속이 풀려."
그 말에 스스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또 한숨 쉬고.
철규는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와중에도 인희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 없다는 검사 결과가 나와 특실로 옮겼지만, 인희는 며칠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는 매번 같은 말만 반복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 말을 들은 철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조금이 대체 며칠인데요…. 의사 선생님들의 조금은 왜 이렇게 길어.'
병실 의자와 간이침대는 이제 철규의 전용 구역이 되었다.
하도 사용하다 보니 엉덩이가 먼저 자리를 찾을 정도였다.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
"오늘은 좀 달라진 거 없나요?"
"네, 아직은요."
"아… 또 아직이네요."
철규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러다 병원에서 월세 내고 살라고 하는 거 아니야?'
혼자 싱겁게 웃어 보지만, 금세 표정은 무거워졌다.
다른 건 다 나중이었다.
잔소리도, 거짓말도, 부부싸움도.
인희만 눈을 뜨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5일째. 며칠 사이 더위가 한층 깊어졌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 한가운데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철규는 병실 창가로 가 커튼을 활짝 젖혔다.
햇살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인희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여보. 햇빛도 출근했는데 당신만 계속 결근이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철규는 한숨을 쉬며 다시 의자에 앉으려는데….
순간, 인희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본 것이다.
철규는 바로 일어나 안경을 벗어 눈을 비볐다.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다시 바라봤다.
꿈틀.
또 움직였다.
"어?"
이번에는 입술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으…."
철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몇 초 동안 입만 벙긋거리다가 갑자기 병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우리 집사람… 드디어 일, 일어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