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배려

수왕기

by마이즈

상가 안에 있는 게임 가게에는 누구나 할 수 있도록 켜두는 시연용 기기가 하나씩 있었다. 대부분은 패미콤이었는데, 안쪽 가게 한 군데에서만 메가드라이브를 켜두었고 덕분에 가게 앞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많이 모여서 인지 막상 게임을 플레이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선이 집중되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게임을 잘한다고 듣는 내가 이런 곳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해보는 게임을 잘하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메가드라이브 시연기에서는 데모 플레이만 돌아가곤 했다.

A_nostalgic_scene_inside_a_late_1980s_Korean_underground_sh_8cc4c876-8575-42.png?type=w1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게임이 틀어졌다. 오락실에서 이미 엔딩까지 갔던 게임, 수왕기였다. 저 게임이면 내가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친구들 앞에서 록맨을 플레이하며 박수받은 일도 떠올랐다. 오락실과 다른 점은 컨트롤러가 스틱이 아닌 패드라는 점인데, 잘할 수 있을까? 약간의 걱정이 들긴 했지만 과감하게 도전했다. 구경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가게 주인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구경만 하던 메가 드라이브에 도전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405.png?type=w1

오락실보다 조금 가볍고 그래픽이 다르긴 했지만 나름 할만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오락실에서 사용한 보스전의 꼼수가 대부분 그대로 먹힌다는 점이었다. 먹히지 않는 경우에도 적당히 컨트롤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익숙한 게임인 덕분에 첫 플레이에서 4 스테이지까지 진행했다. 이 느낌이면 메가드라이브 버전도 엔딩까지 갈 수 있겠는데? 게임이 끝난 뒤에 돌아봤지만, 도전하려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두 판 세 판을 이어서 진행했다. 4 스테이지 보스부터는 오락실의 꼼수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엔딩까지는 가지 못했다.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457.png?type=w1

그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메가드라이브를 하러 가게에 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최종 보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이 게임의 엔딩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결국 이 모든 치열한 싸움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오락실에서 내가 겪은 부정적인 경험을 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결국 나는 마지막 보스를 쓰러뜨리지 않고 일부러 죽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수왕기가 멋진 게임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 이후에도 종종 메가드라이브에 수왕기가 틀어져 있으면 플레이하곤 했지만, 마지막 스테이지를 끝내지는 않았다.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543.png?type=w1

시간이 지나 메가드라이브를 갖게 된 이후, 집에서 수왕기를 플레이했다. 어차피 허무한 엔딩을 알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마지막 보스를 물리쳤다. 어라? 이럴 수가! 메가드라이브 판 수왕기는 영화 촬영이 아니었다. 잡혀간 여신을 구해냈고 거기에서 게임이 끝이 났다. 심지어 스탭롤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이런 줄 알았다면 그때 가게에서 플레이할 때 엔딩까지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나는 다시 한번 스타가 되었을 텐데.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626.png?type=w1

.

.

.

마이즈의 30가지 메모리 -1988

수왕기. MD. 세가.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519.png?type=w1

메가드라이브 판 수왕기는 당시에는 아케이드 게임인 원작을 거의 그대로 이식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메가드라이브 초기에 인기가 많았던 게임이기도 하지요. 패미콤을 비롯한 8비트 기기로는 이식이 불가능한 게임이기도 했으니까요. 게임은 공략 방법까지 거의 그대로 이식되기는 했습니다만, 엔딩은 약간 차이가 납니다. 스탭롤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도 나름의 특징일 수 있겠네요. 저에게는 엔딩의 차이가 크게 여운이 남는 게임이었습니다.

%EC%8A%A4%ED%81%AC%EB%A6%B0%EC%83%B7_2026-10-07_211704.png?type=w1
월, 화, 목, 금 연재
이전 12화무너진 로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