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르네트르 강

강은 모두 이어져 있다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대공저 후원에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일찍 일어난 하인들이 아직 어두운 뒤뜰에서 눈을 치우고 마구간 지붕에 쌓인 눈도 털어내고 있었다. 서까래로 눈더미를 미는 소리와 하인들이 서로 여기! 여기!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세라비는 대공저 뒷문으로 나갔다. 아직 어두운 새벽의 희끄무레한 빛 속에 트루아벨 거리의 집들은 눈이 쌓여 두터운 흰 이불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세라비는 뒷문을 지나 크고 작은 골목과 길을 건너 르네트르 강으로 향했다. 트루아벨을 가로지르는 쿠젤 강의 지류인 르네트르 강은 소리 없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은 강둑의 산바카라로를 덮고 난간 위에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강가의 버드나무 가지 위에 포개진 눈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지며 물 위에 소복이 쌓이는 듯하더니 곧 떠내려갔다.


강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가에 놓인 벤치들 위에도 역시 눈이 쌓여 있었다. 세라비는 장갑을 벗고 그중 하나를 털었다. 벤치 중에는 사람의 이름과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새겨진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이카리아와 마찬가지로 칼베르에도 시내를 흐르는 강가에는 이렇게 고인을 기리며 가족과 친지들이 만들어 기부한 벤치들이 많았다.


세라비가 방금 눈을 털어낸 벤치에는 두 가지의 날짜와 함께 ‘딸아,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세라비는 옆의 벤치에 가서도 눈을 털어 보았다. 그곳에는 좀 더 간단하게 ‘엄마,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었다.


세라비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그곳에 가족의 이름을 새긴 사람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 자신도 어딘가의 벤치에 곧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고 자신을 바쳐 나라를 구했으니 벤치뿐만이 아니라 온 나라 여기저기에 동상과 흉상과 기둥과 비석과 기념관이 지어질 것이었다.


세라비는 여전히 느릿하게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난간을 두 손으로 매달리듯 움켜잡았다. 르네트르 강은 쿠젤 강의 지류이니 강과 계곡과 개울과 폭포를 끝없이 거슬러가다 보면 끝에는 템푸스 아르카가 나올 것이다. 쿠젤 강의 원천은 플레베르 신전의 폭포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카리아의 카론 강도 그 폭포에서 나와 흘러가는 거라고 했다. 나룻배 아저씨가 배를 몰고 지나가면 플레베르 여신의 옷자락 같은 무지개색 물보라가 튀는 라를르 마을 곁의 그 카론 강으로. 강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세라비는 신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 같은 냉철한 사람조차도 쉬드르 신의 계시 하나만 믿고 길을 떠나 이곳까지 세라비와 함께해 왔고, 신이고 유물이고 아예 믿지 않던 게로스도 절박해지자 솔렌과 뤼넬을 꺼냈다. 세라비는 자신도 신에게 부탁해 보기로 했다. 플레베르 여신이라면 세라비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왜냐면 세라비는 항상 강가에 있었으니까. 세라비는 르네트르 강을 향해 마음속으로 여신에게 말을 걸었다. 플레베르 여신님, 제 말을 들어주세요. 여신님의 신전에서 쓰러진 그 사람이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어요.


플레베르 신전에서 게로스가 신들과 마주 보고 있던 광경이 떠올라 세라비는 여신에게 말을 걸다 말고 난간에 매달려 흐느꼈다. 플레베르 여신은 자기 신전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것도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세라비는 차가운 난간에 이마를 대고 여신에게 속삭였다. 여신님,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제발 그 사람이 돌아오게 해 주세요…


강물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눈송이들이 툭 툭 소리를 내며 강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릴 뿐 사방은 아주 고요했다. 찌푸린 하늘은 금방 다시 눈이 내릴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라비는 난간을 쥔 손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강둑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 다니기 시작했다. 우유를 배달하는 마차의 방울 소리와 함께 빵집에서 빵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세라비는 꽁꽁 언 손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가 없는 동안 게로스가 숨을 거두지 말았기를 빌며 빠른 걸음으로 같은 길을 걸어 대공저로 돌아갔다.


방 안은 세라비가 나갈 때와 그대로였다. 세라비가 없는 동안 교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의사는 세라비가 돌아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세라비는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세라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햇빛을 받으면 황금처럼 빛나던 머리카락은 난롯가의 재처럼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빠져 머릿속이 드러나 보였다. 여위다 못해 말라빠진 해골 같은 얼굴에는 검푸른 반점과 주름이 가득했다. 신들은 그에게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져갔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 추한 노인뿐이었다.


세라비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다시 게로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어제와 그저께 그리고 그 전날에도 했었던 것처럼 잡다한 얘기를 천천히 나직하게 건넸다. 얘기할 것도 이제 다 떨어져서 했던 얘기도 또 했다. 그러다가 지쳐서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르네트르 강 -1.png르네트르 강의 난간에 기대어 기도하는 세라비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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