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적인 숨소리와 아주 희미한 숨소리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플로르와 레이첵이 떠난 발렌도르 대공저는 쓸쓸했다. 레이는 이카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왜 남는지는 세라비도 몰랐다. 세라비는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가 남아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가 같은 집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라비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어느 날 대공이 세라비에게 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렌베르크에서도 폐하는 이제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대사께서 폐하의 임종을 지키실 거라면 계속 계셔도 좋지만 혹시라도 희망을 갖고 계시는 거라면 이젠 단념하시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게로스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은 지 이미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렌베르크에서는 이미 클로드 에티엔을 중심으로 비상 체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대공은 자기들이 게로스의 유일한 친척으로서 그의 임종을 지킬 테니 원한다면 이카리아로 돌아가셔도 된다고 말했다. 세라비는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세라비는 게로스의 연인이었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이카리아 대사였던 것이다.
코린은 파렌베르크로 떠나기 전 세라비를 찾아와 그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게로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울면서 말해 주었다. 그가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나중에는 세라비가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어야만 했다.
코린의 얘기를 들으며 세라비는 머릿속으로 왕립 학교의 회랑 끝에 외롭게 서 있는 소년을 상상했다. 이 사람은 왜 길지도 않은 자신의 평생을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며 살아야만 했을까,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그래서 세라비는 그가 혼자 외롭게 죽어가게 놔둘 수가 없었다. 세라비는 그 방에서 먹고 자며, 게로스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아 주었다. 그 손은 이제 오델 몽테 촌장 노인의 손보다 메마르고 주름져 있었다. 그의 얼굴도 이젠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대공과 대공비는 방에 찾아와도 이젠 게로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세라비는 더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젊고 아름다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했는데, 그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람들을 살리고 나자 고개를 돌리는 것을 세라비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라비는 게로스가 클로드 에티엔에게 문서를 남겨, 세라비와 레이에게 오스틴에 포로로 잡힌 왕을 구출한 공로에 대해 적절한 포상을 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라비는 대공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필요 없고 실제로 게로스를 구출한 것은 레이이므로 레이에게 뭐든지 원하는 것을 줄 것을 부탁했다. 대공은 슬픈 눈으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심사는 파렌베르크가 안정을 찾은 다음에 진행될 겁니다. 그때 다시 논의가 되면서 대사님께 연락이 갈 겁니다…”
그 뒤의 말은 생략되었지만 세라비는 알아들었다. ‘차기 왕으로부터’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가 죽을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슬펐다. 아직 살아 있는데 왜 다들 그가 이미 죽은 것처럼 말하지? 세라비는 침대 위로 올라가 게로스의 옆에 누워 보았다. 그리고 플레베르 신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어둠 속에서 지푸라기 끝에 불을 댕긴 것처럼 희미한 소리가 금방 꺼져갈 것처럼 미미하게 뛰고 있었다. 방이 조용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은 가냘픈 소리였다. 세라비는 게로스의 옆에 누워 그를 껴안았다. 노인처럼 쭈그러든 그의 몸은 세라비가 한쪽 팔로 감싸고도 공간이 한참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플레베르 신전에서 유언처럼 너를 집에 꼭 보내준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냐, 하고 세라비는 게로스에게 투정하듯 말을 건넸다. 마지막이면 두들겨 깨워서 아침 산바카라이라도 하자고 하지 그랬어. 나 자고 있는 동안 내려가 버렸잖아. 중요한 얘기 이제 다 해주기로 해놓구 진짜 중요한 얘기는 또 안 해줬지. 다음번엔 진짜 따귀야.
세라비는 게로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다가 잠이 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아주 희미한 숨소리가 조용한 방을 채웠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해 겨울의 첫눈이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