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1830년 12월 24일, 라이프치히 극장에서 자선 연주회가 열렸다. 프로그램에는 열일곱 살 소년이 쓴 내림나장조 서곡이 하나 끼어 있었다. 곡에는 다섯 마디마다 팀파니가 포르티시모로 한 번씩 내리치는 대목이 있었다. 그 규칙적인 타격이 몇 차례 반복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이 곡은 훗날 팀파니 일격 서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작곡가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 초연의 실패가 남긴 이름으로, 리하르트 바그너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관현악 작품이다. 악보는 남아 있지 않다.
바그너는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했고 정규 음악 교육이라 부를 만한 것을 거의 받지 못했다. 자기 서곡이 왜 웃음을 사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반세기 뒤 유럽 음악의 판을 통째로 다시 그리게 될 사람의 출발점이라기에는 다소 평범하다.
바그너가 자란 집은 음악의 집이 아니라 극장의 집이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났고, 시 경찰의 서기였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그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티푸스로 죽었다. 이듬해 여름 어머니는 죽은 남편의 친구였던 루트비히 가이어와 살림을 합쳤고, 가족은 드레스덴의 가이어 집으로 옮겨 갔다. 가이어는 배우이자 극작가이자 화가였다. 그의 극단은 곧 드레스덴 궁정 앙상블에 편입됐고, 그 무렵 그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가까워진다. 형 알베르트는 오페라 가수 겸 연출가였고, 누나 로잘리에와 루이제는 배우였으며, 누나 클라라는 오페라 가수였다. 저녁 식탁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배역과 흥행과 극단 사정이었던 집이다. 리하르트는 열네 살까지 가이어라는 성을 쓰고 살았다.
그 집에서 소년 바그너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음악보다 극이었다. 셰익스피어와 괴테에 취해 열세 살 무렵 〈로이발트〉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유령이 나오고 사람이 여럿 죽는 습작이었다. 그리고 그 희곡에 음악을 붙이겠다는 생각으로 가족을 졸라 처음 작곡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보통의 작곡가들과는 반대의 행보다. 음악을 파고들다 극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극작가 지망생이 자기 희곡을 완성하려고 음악을 배우러 간 것이다. 그가 평생 대본을 남에게 맡기지 않은 이유의 절반이 여기 있다.
배움의 이력은 짧다. 라이프치히 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고틀리프 뮐러에게 화성의 기초를 배웠고, 그 얼마 뒤에 나온 결과물이 객석의 웃음을 산 그 서곡이었다. 자기 실력의 구멍을 확인한 그는 1831년 가을 성토마스교회의 칸토어 크리스티안 테오도어 바인리히를 찾아간다. 바흐가 앉았던 자리였고, 클라라 비크를 가르친 사람이었다. 이 배움도 시작이 나빴다. 한 번 내쳐졌다가 애원해서 다시 받아들여졌고,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여섯 달 동안 화성과 카논과 대위법에 열중했다. 훗날 그는 바인리히에게 특별한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다만 그는 명료하고 실무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작곡은 특별히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보기를 짚어주고 과제를 내고 고쳐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데, 그의 스승 또한 오로지 그 방법에만 성실했다고 한다.
스승은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섯 달 사이에 나온 내림나장조 피아노 소나타를 제자의 작품 1번으로 출판되도록 주선했다. 소나타는 바인리히에게 헌정됐다.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이 스승의 판단이었다. 알려진 한 리하르트 바그너가 받은 전문 교육은 그 여섯 달이 전부였다. 당시 라이프치히에는 아직 음악원이 없었다. 멘델스존이 그 도시에 음악원을 세우는 것은 십일 년 뒤의 일이고, 음악가가 되는 길은 학교가 아니라 개인 사사와 극장 실무였다. 바그너는 취직하지 않고 혼자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그해 다장조 교향곡을 완성했고, 이 곡은 프라하에서 먼저 연주된 뒤 12월 15일 라이프치히의 오이테르페 협회에서 초연됐다. 지휘자는 그의 첫 스승 뮐러였다. 이틀 뒤 열세 살의 클라라 비크가 슈만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의 제자였고 훗날 그의 남편이 되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그 연주회에 다녀왔는데 바그너라는 사람이 당신보다 앞서갔더라고, 그의 교향곡이 베토벤 7번과 쏙 빼닮았다는 말이 돌더라는 내용이었다.
스무 살 청년 바그너는 지방 극장에 들어갔다. 형이 있던 뷔르츠부르크에서 합창 지휘자로 시작해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를 거쳐 발트해 변두리의 리가까지 갔다. 그의 이십 대를 채운 것은 파산 직전의 극단과 늘 모자란 리허설, 도망친 가수와 밀린 급료였다. 오페라를 악보로 배운 것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기계의 배선을 들여다보며 배운 것이다. 그중 리가의 극장에서 바그너는 한 가지를 눈여겨봤다. 오케스트라가 무대 아래로 내려앉아 있는 구조였다. 연주자가 시야에서 지워지면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게 되고, 관객의 주의는 무대 하나로 모인다. 바그너는 그 효과를 변두리 극장에서 몸으로 익혔고, 삼십 년 넘게 잊지 않았다.
리가에서의 끝은 야반도주였다. 빚쟁이를 피해 국경을 넘어 배를 탔고, 파리에서 편곡 잡일로 몇 해를 연명했다. 그 도시에서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실패했다.
한참 뒤 그는 바이에른 북부의 소도시 바이로이트 외곽 언덕에 극장을 짓기로 결심한다. 바이로이트는 음악의 수도도 아니었고 궁정의 중심도 아니었으며, 이렇다 할 극장 문화도 비평가 집단도 없었다. 유럽의 어느 작곡가도 경력을 걸 이유가 없는 도시였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바이에른의 작은 외곽 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작곡가들은 중심으로 가려고 애를 썼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빈에는 엄청나게 많은 작곡가가 몰려들었고, 우리가 아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빈에서 활동했다. 바그너 당대에도 오페라의 중심은 파리와 빈과 밀라노였다. 성공하려면 그 도시들의 극장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바그너가 엉뚱하게도 바이로이트를 선택했다.
1872년 5월 22일, 바이로이트 극장의 정초식이 열렸다. 그날은 그의 쉰아홉 번째 생일이었고, 비가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언덕에서 주춧돌을 놓는 절차가 끝난 뒤 그는 시내의 변경백 오페라하우스로 자리를 옮겨 기념 음악회를 열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직접 지휘했다. 바그너에게 베토벤은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스승인 바인리히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정신적 스승이었다. 열일곱 살에 9번 교향곡을 피아노 편곡으로 옮겨 적으며 베토벤의 과감함과 논리적인 화음 전개와 예술 철학을 배웠고, 이러한 음악이 극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베토벤을 공부하면서 쓴 첫 작품인 팀파니 일격 서곡은 실패했지만, 그는 베토벤을 통해 자기 음악 어법에 대한 고민을 이어왔다.
바그너는 어떻게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1840년대의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카펠마이스터였다. 당대 독일에서 음악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안정된 자리 중 하나였고, 지방 극장을 전전하던 사람이 마침내 중심에 도달했다. 바그너는 그 중심에서 오페라 극장이라는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다시 한번, 이번에는 카펠마이스터로서 위에서 내려다보며 확인했다. 그는 극장이 음악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박스석의 귀족들은 무대가 아니라 서로를 구경했고, 객석의 불은 공연 내내 켜져 있었으며, 오케스트라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훤히 드러나 앉아 관객의 시선을 갈랐다. 레퍼토리는 흥행 논리로 짜였고 리허설은 늘 모자랐다. 바그너는 오페라 극장에서 음악이 그저 사교의 배경인 것을 직시했다.
당대 오페라는 분업의 산물이었다. 대본가가 기존의 희곡이나 소설을 오페라 문법에 맞게 각색해 넘기면 작곡가가 거기에 음악을 입혔다. 모차르트에게는 다 폰테가 있었고 베르디에게는 여러 명의 대본가가 있었다. 각색된 대본은 아리아를 세울 자리, 이중창을 배치할 자리, 합창으로 막을 닫을 자리가 미리 계산된 설계도였고, 작곡가는 그 설계도 위에서 일했다. 지금의 영화로 치면 각본가가 쓴 시나리오에 작곡가가 나중에 음악을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야기의 뼈대는 이미 다른 사람 손에서 정해져 있고, 음악은 거기에 맞춰 들어간다.
바그너는 이 분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그는 모든 오페라의 대본을 자기 손으로 썼다. 또한 동시에 극에 맞는 음악을 만들었다. 열세 살에 유령이 나오는 비극을 쓰던 소년이, 첫 작품의 고배를 마신 젊은 청년이 이 분업의 판을 엎었다. 주요 작곡가 가운데 이 원칙을 전 작품에 걸쳐 지킨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대본을 직접 쓰자 기존 오페라의 단위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대 오페라는 번호가 붙은 곡들의 묶음이었다. 레치타티보로 줄거리를 처리하고, 아리아에서 멈춰 서서 노래하고, 아리아가 끝나면 박수가 터지고, 다시 줄거리로 돌아가는 구조다. 각각의 번호는 따로 떼어내 연주회에서 부를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소비됐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극이 끊기는 이 관행을 바그너는 해체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음악은 막이 오르면 막이 내릴 때까지 끊기지 않고 흐른다. 그는 끊기지 않고 흐르는 이 선율을 무한선율이라 불렀다. 박수 칠 자리를 없앤 것이다.
끊기지 않는 몇 시간의 음악을 지탱하려면 새로운 뼈대가 필요했다. 바그너는 짧은 선율 동기에 인물과 사물과 감정을 결부시키고, 그 동기들을 작품 전체에 걸쳐 변형하며 짜 넣는 방법을 체계화했다. 칼의 동기, 반지의 동기, 운명의 동기. 무대 위의 인물이 아직 모르는 것을 오케스트라가 먼저 말하고, 지나간 사건의 동기가 다른 조성으로 돌아와 기억을 건드린다. 훗날 라이트모티프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이 기법은 바그너의 발명품이 아니다. 반복되는 동기로 극을 엮는 시도는 베버에게도 있었고, 베를리오즈는 고정악상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일을 했다. 바그너가 한 일은 그 산발적 시도를, 나흘 밤에 걸쳐 상연되는 대작을 지탱하는 구조 원리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순간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바뀌었다. 가수를 받쳐주는 반주자가 아니라 무대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말하는 또 하나의 서술자가 되었다.
후에 바그너는 조성이라는 더 깊은 판까지 흔들었다. 화음 하나로 음악의 문법을 유예시킨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 내용은 이 글에서는 각설한다. 요점은 바그너가 극장에 손대기 전에 오페라라는 장르의 설계도부터 다시 그렸다는 것이다.
1849년 5월 3일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작센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새 헌법을 거부한 것이 발단이었다. 궁정극장의 카펠마이스터였던 바그너는 진압되는 쪽이 아니라 봉기하는 쪽에 섰다. 그는 급진 신문 〈폴크스블레터〉를 내던 지휘자 아우구스트 뢰켈, 그 무렵 드레스덴에 와 있던 러시아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과 어울렸고, 그 신문에 봉기를 선동하는 글을 실었다. 시가전이 벌어지자 그는 십자가교회 탑에 올라가 망을 봤다고 전해지며, 수류탄 제작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같은 바리케이드에는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도 있었다. 봉기는 엿새 만에 무너졌다. 5월 19일 자 드레스덴 신문에 그의 수배 전단이 실렸을 때 그는 이미 바이마르의 리스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뢰켈과 바쿠닌은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고, 감형된 뒤에도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바그너는 스위스로 넘어가 십이 년 넘게 독일 땅을 밟지 못했다.
리가에서 한 번, 드레스덴에서 다시 도시를 떠났다. 그는 안정된 자리를 잃었지만 시간을 얻었다. 망명지에서 바그너는 먼저 글을 썼다. 미래의 예술은 음악과 시와 연극이 하나로 녹은 총체예술이어야 한다는 것, 대본과 음악의 분업이 아니라 한 정신의 통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그의 실천이 이 시기에 이론으로 다져졌다. 그리고 바그너는 자기 예술 철학과 이 이론 끝에서 피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의 작품은 오페라 극장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수 자리를 없앤 음악을 박스석의 사교장에서 공연할 수는 없었다. 무대 위의 작품만 새로 쓰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작품을 담는 그릇, 그러니까 판 자체가 문제였다.
보통의 작곡가라면 여기서 타협했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작곡가가 그렇게 했다. 주어진 극장의 조건에 곡을 맞추고 박스석의 취향과 협상하며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답을 찾는 것, 그러니까 주어진 제약 안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어쩌면 작곡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그너는 다른 길을 골랐다. 제약 안에서 최선을 찾는 대신 제약이 설계된 방 자체를 나가기로 했다.
기회가 먼저 온 곳은 뮌헨이었다. 1864년 3월 열여덟 살에 바이에른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는 열다섯 살에 〈로엔그린〉을 보고 열 달 뒤 〈탄호이저〉를 본 뒤로 바그너에게 사로잡힌 소년이었다. 즉위하고 몇 주 만에 그는 사람을 보내 바그너를 찾아냈다. 그때 바그너는 쉰한 살에 빚에 쫓기며 떠도는 신세였다. 5월 4일 뮌헨 궁전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고, 왕은 그의 빚을 갚아주고 거처와 급료를 마련했다. 이십여 년 전 바리케이드에서 왕정을 무너뜨리려던 사람이 이제 왕의 돈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사이 그의 정치는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1848년의 그를 움직인 것이 공화주의와 아나키즘 쪽 급진론이었다면, 망명기를 지나며 남은 것은 독일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그 이동의 한복판인 1850년, 그는 취리히에서 가명으로 유대인 음악가들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그를 후원한 왕과 그가 지을 극장의 이야기가 이 사실과 같은 시간대에 나란히 놓여 있다는 점은 여기서 짚어두어야 한다.
왕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에게 바그너를 위한 기념비적 축제극장의 설계를 맡겼다. 십오 년 전 드레스덴의 같은 바리케이드에 섰다가 함께 망명했던 그 젬퍼였다. 여유롭게 사는 절호의 기회였을지 모르나 바그너는 이 계획에서 발을 뺐다. 왕의 극장은 결국 왕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판을 새로 짜는 일의 핵심은 규모가 아니라 통제권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휘자 한스 리히터가 바이로이트라는 도시의 이름을 꺼낸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곳의 오래된 후작 오페라하우스가 쓸 만하다는 이야기였는데, 1871년에 직접 가서 본 극장은 그의 목적에 맞지 않았다. 대신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기존 극장이 없으니 기존 관습도 없었고, 바이에른 땅이니 왕의 보호가 닿았고, 작아서 조용했다. 그는 극장을 고치는 대신 언덕 위에 새로 짓기로 했다.
그렇게 올라간 건물은 벽돌과 목재로 쓴 비평문과 같았다. 기존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불만 하나하나가 설계로 번역됐다. 박스석은 없앴다. 객석은 고대 원형극장을 본떠 부채꼴로 폈고, 모든 좌석이 무대를 향하게 했다. 서로를 구경할 자리를 없앤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객석의 불을 껐다. 지금은 당연한 이 관행이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 바이로이트로 꼽힌다. 그리고 가장 급진적인 결정으로, 오케스트라를 무대 아래로 가라앉혔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라 부르는 그 공간이다. 삼십 년도 더 전에 리가의 극장에서 본 그 구조가 이제 그의 손에서 끝까지 밀어붙여졌다. 관객의 눈에는 연주자도 지휘자도 보이지 않고, 음악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심연에서 솟아올라 극장을 채운다. 바그너는 이 공간을 신비의 심연이라 불렀다. 무대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말하는 서술자에게 보이지 않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공사 중에 오케스트라 자리가 모자라자 그는 객석 앞줄을 뜯어내며 구덩이를 두 번 넓혔다. 어느 쪽을 우선하는지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왕의 극장을 거절했으니 왕의 금고도 없었다. 바그너는 후원 증서를 발행하고 각지에 바그너 협회를 세워 기금을 모았다. 오늘날의 크라우드펀딩이었고, 그 펀딩은 실패했다. 목표액은 채워지지 않았고 공사는 멈춰 섰다. 결국 루트비히 2세가 차관 형태로 자금을 대면서 건물이 완성됐다. 판을 새로 짜겠다던 사람이 끝내 왕의 돈을 빌린 것이다. 다만 소유권과 운영권은 자기 손에 남겼다. 그가 양보하지 않은 마지막 선이 그것이었다.
1876년 8월 13일, 극장은 별도의 개관 행사 없이 곧바로 첫 축제의 첫 공연으로 문을 열었다. 극장의 개관이 곧 축제였다. 이날부터 나흘에 걸쳐, 자기가 쓴 대본과 자기가 체계화한 라이트모티프의 그물과 자기가 설계한 어둠, 이 모든 것의 총합인 〈니벨룽의 반지〉 전곡이 사상 처음으로 완주됐다. 객석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가 앉았고, 차이콥스키와 그리그, 브루크너, 생상스가 이 소도시까지 찾아왔다. 이십칠 년 전 수배자 바그너를 숨겨주었던 리스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유럽의 황제와 작곡가 들을 자기가 지은 극장의 자기가 정한 규칙 아래 불러 모은 것이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자 남은 것은 갚을 길 없는 적자였다. 극장은 이후 육 년간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1882년 〈파르지팔〉로 두 번째 축제가 열렸고, 바그너는 그 이듬해 죽었다. 그가 살아서 본 자기 축제는 두 번이 전부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바그너의 업적만 보이지만 역설적인 지점이 있다. 1850년에 바그너는 가명으로 유대인 음악가들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고, 1869년에는 같은 글을 자기 이름을 달아 다시 펴냈다. 음악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공간을 상상한 정신과 당대의 가장 추한 편견을 증폭한 정신이 같은 사람 안에 있었다. 훗날 그의 극장과 음악이 어떤 정치에 동원됐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바그너가 위대한 판을 짠 것은 사실이나 좋은 사람이었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이 바카라이 천재라는 말을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신화는 사람을 통째로 숭배하게 만들지만, 기록은 업적과 결함을 한 사람 안에 나란히 놓는다.
바그너가 남긴 판은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여름 같은 언덕에서 열린다. 그러나 더 넓게 퍼진 유산은 따로 있다. 오늘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순간, 오페라나 뮤지컬 무대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음악으로 시작되는 순간. 그 경험의 설계도가 바이로이트에서 나왔다. 인물마다 주제 선율을 붙이는 영화음악의 문법도, 영화관의 어둠도 그 후손이다. 판을 새로 짠 사람의 흔적은 이렇게 남는다. 그가 만든 규칙이 너무 당연해져서, 아무도 그것이 한때 누군가의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베토벤은 주어진 판 위에서 네 개의 음표를 끝까지 밀었다. 브람스는 판 위에 오르기 전에 이십일 년을 기다렸다. 바그너는 판 자체를 거부하고 새로 짰다. 각자 자기 작품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읽고 그 값을 치렀다. 다만 바그너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판을 새로 짜는 일이 판을 뒤집는 한순간의 호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웃음을 산 서곡에서 시작해 변두리 극장의 십 년과 이십 년의 글쓰기와 실패한 모금과 빌린 돈과 여섯 해의 폐관을 견디는 데까지 이어지는 일이었다. 지금 서 있는 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새 판의 값을 끝까지 치르는 사람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