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땅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다

안토닌 드보르자크

by크로마

1893년 겨울 어느 저녁,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실에서 스물여섯 살의 흑인 학생이 노래를 불렀다. 이름은 해리 버레이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학교 일을 하던 청년이었고, 노래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영가였다. 바카라상 맞은편에는 쉰한 살의 체코인이 앉아 있었다. 이 학교의 원장인 그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브람스와 나란히 이름이 불리던 작곡가였다. 노래가 끝나면 그는 "다시"라는 한 마디만 했다. 버레이는 훗날 그 저녁들을 그렇게 회고했다.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어느 악보에도 적힌 적 없는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이 장면이 왜 뉴욕에서 벌어졌는지 이해하려면 그 무렵 유럽 음악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부터 봐야 한다.

앞 장에서 본 대로 바그너는 판을 새로 짰다. 화성을 끝까지 밀어붙였고, 극장을 새로 지었고, 후대에게 자기 이름이 붙은 길 하나를 남겼다. 문제는 그 길이 너무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데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반음계는 조성의 중력을 거의 놓아 버린 지점까지 갔고,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작곡가는 둘 중 하나를 각오해야 했다. 바그너의 아류가 되거나, 조성 자체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전자를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노선에서 살아남은 대표적인 이름이고, 후고 볼프는 가곡이라는 좁은 무대에서 그 화성을 견뎠다. 후자를 실제로 택한 사람들은 십 년쯤 뒤 빈에서 나오게 된다.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이다. 그러나 1890년대 대다수 작곡가에게 두 선택지는 모두 막다른 골목으로 보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앞이 아니라 옆으로 움직였다. 화성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대신, 아예 다른 곳에서 재료를 가져오는 방법이었다. 러시아의 교회 선법, 노르웨이의 무곡, 스페인의 리듬, 다섯 음으로만 이루어진 음계. 이런 재료는 독일 음악의 문법 안에서 자란 귀에는 낯설게 들렸고, 낯설다는 것은 곧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젊은 드뷔시가 그 경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바이로이트를 두 해 연속 순례할 만큼 바그너에 빠져 있었고,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바의 가믈란을 듣고 돌아섰다. 십구 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음악은 애국심의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갈된 광맥을 앞에 둔 사람들이 찾아낸 새 광맥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의 정치를 보면, 십구 세기 유럽은 민족이라는 단위를 발명하다시피 한 세기였다. 언어학자들이 사전을 만들고, 문헌학자들이 서사시를 발굴하고, 수집가들이 시골을 돌며 민요를 채보했다. 체코에서는 그 흐름이 민족부흥운동으로 불렸고, 1881년 프라하에 국민극장이 세워졌다. 드보르자크는 그 운동의 한복판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서양 건너에서 자넷 서버라는 미국 여성이 같은 질문을 자기 나라에 던지고 있었다.

1850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코펜하겐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딸에게 직접 음악을 가르쳤다. 결혼 상대는 식료품 도매로 부를 쌓은 사업가였다. 그녀가 문제로 여긴 것은 돈이 아니라 소리였다. 미국은 건물을 올리고 철도를 놓고 대륙을 이었지만, 연주회장에서 울리는 음악은 전부 유럽에서 실어 온 것이었다. 미국의 음악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국가적 결핍으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처음 시도한 방법은 미국인으로 미국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1885년 뉴욕주 인가를 받아 아메리칸 오페라 학교를 열었고, 동시에 졸업생을 고용하고 미국 관객에게 오페라를 들려줄 순회 오페라단을 만들었다. 시어도어 토머스가 지휘를 맡았고 예술적으로는 평가가 나쁘지 않았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후원자들이 빠져나갔고, 두 시즌 만에 토머스가 사임했으며, 1888년 초 이 회사는 완전히 무너졌다.


남은 것은 학교뿐이었다. 그녀는 학비를 낮췄고, 여성과 유색인과 장애인에게 문을 열었으며, 때로 전액 장학금을 주었다. 1891년에는 의회가 법률로 이 학교를 법인화했다.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치였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워싱턴에 연방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립음악원을 세우고 전국에 분교를 두는 것이었고, 미국이 예술에 국고를 쓰지 않는 유일한 산업국이라는 사실을 평생 문제 삼았다.


그렇게 자국민으로 미국 음악을 만드는 길이 한 번 막힌 뒤, 그녀는 방향을 뒤집었다. 미국 음악을 만들 사람으로 외국인을 데려오기로 했다.


왜 드보르자크였는가

브람스는 여러 해 동안 오스트리아 국가 장학금 심사위원이었고, 그 자리에서 무명에 가까운 체코 작곡가의 악보를 반복해서 보게 되었다. 1877년 그는 자기 악보를 내던 출판사 짐로크에 그 이름을 추천했다. 짐로크가 먼저 낸 것은 모라비아 이중창이었고, 반응을 확인한 뒤 곧바로 위촉한 것이 슬라브 무곡이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이미 대량으로 팔린 뒤였으니 이 위촉은 예술적 판단이자 상업적 판단이었다. 1878년에 나온 슬라브 무곡은 유럽 전역에서 팔려 나갔다.


브람스가 알아본 것과 출판사가 산 것과 서버가 산 것은 같은 능력이다. 보헤미아라는 변방의 민속 어법을 중심 무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민족적인 것을 공통된 어법 안에서 이해되도록 다루는 능력이다. 서버의 제안은 그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연봉은 만 오천 달러였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드보르자크는 여러 달을 망설인 끝에 1892년 가을 대서양을 건넜다.


드보르자크가 도착한 뉴욕에 음악이 없지는 않았다. 뉴욕 필하모닉은 반세기 전부터 있었고, 보스턴 심포니는 십 년 남짓, 시카고 심포니는 창단 한 해째였다. 카네기홀은 전해 봄에 문을 열었고 개관 공연의 지휘대에는 차이콥스키가 섰다. 뉴욕 필의 상임 지휘자는 바그너의 조수를 지낸 안톤 자이들이었다. 유럽의 거장을 돈으로 불러오는 방식은 이미 이 도시의 관행이었다. 다만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은 닫혀 있었다. 그가 도착하기 한 달 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화재로 내부를 잃었고, 그해 시즌은 통째로 취소되었으며, 극장은 이듬해 늦가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하드웨어는 있었다. 연주회장이 있었고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표를 사는 청중이 있었다. 없는 것은 그 안에서 울릴 미국의 소리였다.


서버가 그에게 맡긴 일이 바로 그 자리를 채우는 일이었다. 문제는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는 데 있다. 유럽인들은 미국에 고유한 음악 전통이 없다고 여겼고, 미국인들 스스로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드보르자크는 남의 나라에 와서 그 나라 사람들조차 모르는 그 나라의 소리를 찾아내야 했다.


그는 원장실로 버레이 같은 학생들을 불러 영가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영가만은 아니었다. 롱펠로의 서사시 『하이어워사의 노래』를 읽었고, 뉴욕에 들어온 순회 서부극 공연단을 통해 원주민 연주자들의 무대를 접했으며, 스티븐 포스터의 「올드 포크스 앳 홈」을 가져다 독창과 합창과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1893년 여름 아이오와의 체코 마을에서는 마을에 이 주간 머문 순회 공연단의 선율을 비서가 대신 받아 적었다. 초연 직전 그를 인터뷰한 평론가 크레비엘은 해설 기사에 앨리스 플레처의 원주민 음악 채보 작업을 함께 언급했다. 이 나라에서 소리라 부를 만한 것이면 일단 귀에 넣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원주민 음악에 관한 드보르자크의 지식은 대부분 간접적이었다. 백인 시인의 낭만적인 서사시, 흥행을 목적으로 조직된 공연단, 유럽식 오선지 위에 옮겨 적힌 채보를 거쳐 왔다. 그가 원주민의 정신이라 부른 것 중 상당 부분은 십구 세기 백인 미국이 원주민에 대해 가지고 있던 표상이었다. 게다가 그가 원주민 음악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교향곡을 완성하고 반년이 지난 초연 직전이었고, 작곡 시점의 실제 지식보다 그 설명이 앞서 나갔다는 지적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녹음도 아카이브도 없던 시절에 다른 방법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찾아낸 미국이 어떤 필터를 통과해 온 미국인지는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1893년 5월 21일 일요일, 뉴욕 헤럴드에 드보르자크의 인터뷰가 실렸다. 미국 음악의 미래는 흑인들의 선율 위에 세워져야 하며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이미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노예해방으로부터 스물여덟 해가 지난 시점이었고, 인종분리를 합헌으로 확정할 대법원 판결은 삼 년 뒤에 나오며, 남부에서 린치가 가장 빈발하던 십 년의 한복판이었다. 노예의 노래가 한 나라의 음악적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나라의 위계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보스턴의 유력 평론가는 그가 죽고 몇 해가 지나서까지 그를 조롱하는 호칭으로 불렀다.


기사는 그날 밤 대서양을 건너 이튿날 아침 파리판 헤럴드 1면에 실렸다. 특파원들이 빈과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유명 음악가들에게 이 기묘한 이론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돌아온 답변 다수에는 흑인이 위대한 음악의 원천이 될 수 있겠느냐는 노골적인 불신이 담겨 있었다.


말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가을 그는 학교 측을 설득해 흑인 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도록 만들었고, 육백 명 남짓한 재학생 가운데 백오십 명 이상이 흑인이 되었다. 개방 입학은 원래 서버의 방침이었으니 새로운 발명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 방침을 실제 예산이 붙는 제도로 밀어붙였다. 드보르자크 자신이 시골 정육점집 아들로 태어나 오랫동안 오케스트라 뒷줄에서 비올라를 켜며 생계를 꾸린 사람이었으니, 좋은 음악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향곡 9번에서 그가 택한 전략에 이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후대가 신세계라고 부르는 그 곡에 영가 풍의 선율이 있다. 말 그대로 영가 풍일뿐, 기존 영가 선율은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고 그는 여러 차례 밝혔다. 그가 가져간 것은 노래가 아니라 노래를 이루는 재료였다. 음계는 다섯 개의 음으로 돌고, 당김음은 박자를 어긋나게 밟으며, 일곱째 음은 으뜸음으로 끌려가지 않는다. 유심히 보면 이 재료들은 영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음악도 다섯 음으로 돌고, 보헤미아의 민요에도 있고, 스코틀랜드의 노래에도 있다. 그래서 2악장 라르고의 잉글리시 호른이 노래를 시작하면 미국인은 고향의 들판을 들었고 체코인은 보헤미아의 저녁을 들었다.


재료를 바꾸는 동안 그가 손대지 않은 것은 형식이었다.

신세계 교향곡은 네 악장짜리 교향곡이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고, 뒤에 느린 악장이 오고, 3악장에 스케르초가 오고, 빠른 종악장이 온다. 주제가 악장을 넘어 다시 등장하는 순환 구조는 베토벤 이후 유럽이 백 년에 걸쳐 다듬어 온 장치다. 이 곡에서 미국적인 것은 재료뿐이고, 그 재료를 담은 그릇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럽제다. 그는 미국의 소리를 찾아 달라는 주문에 유럽의 설계도를 꺼내 놓고, 그 위에 다른 재료를 올렸다.


이것이 이 곡이 그토록 빨리 받아들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카네기홀에 앉은 청중의 귀는 이미 그 문법을 알고 있었다. 1악장이 시작되면 어디쯤에서 두 번째 주제가 나오고 어디쯤에서 되돌아올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형식이란 그런 것이다. 말로 정확히 정의하지 못해도 몸이 먼저 아는 것이라, 그 익숙한 골격 위에 낯선 선율 몇 개가 얹혔을 때 청중이 느낀 것은 혼란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음악을 만드는 데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익숙한 형식에 낯선 억양을 얹는 일이었다.


1893년 여름, 그는 뉴욕을 떠나 아이오와 주 스필빌로 갔다. 체코 이민자들이 세운 주민 수백 명의 마을이었다. 비서 요세프 코바르지크의 고향이었고, 대서양을 다시 건너지 않고도 고향 말이 들리는 곳이었다. 유럽에 남아 있던 아이들까지 건너와 여섯이 모두 모였다. 그는 아침이면 성당에서 미사 반주를 했고, 산바카라을 했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코바르지크는 그가 그곳에서 음악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고, 그것이 그가 행복했던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고 덧붙였다.


그 여름에 현악사중주 F장조를 썼다. 스케치에 사흘, 완성까지 보름 남짓이 걸렸다. 악보를 마치며 여백에 신께 감사한다, 빨리 되었다고 적었다. 3악장에는 그 마을에서 들은 새소리가 들어갔다. 후대는 이 곡을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가장 체코적인 마을에서 가장 미국적이라 불리는 실내악이 나온 셈이다.


그해 12월 16일, 안톤 자이들의 지휘로 카네기홀에서 신세계 교향곡이 초연되었다. 뉴욕 필하모닉이 국제적으로 이름난 작곡가의 신작을 세계 초연한 첫 사례였다.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해야 했다고 한다. 이튿날 신문은 그해 음악계 최대의 사건으로 이 밤을 적었다.


그렇다면 이 곡은 미국 음악인가

초연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질문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영가를 듣고 어떤 이는 보헤미아를 듣는다. 정작 작곡가 자신은 뒷날 이 곡이 체코 음악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에 체코 음악으로 답했다면, 그 삼 년은 값비싼 우회였을 뿐인가. 그는 미국을 보지 않았다면 이 곡들을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글도 남겼다. 미국이 그의 언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가 무엇을 쓸지는 바꿔 놓았다.


더 확실한 답은 그가 떠난 뒤에 왔다. 1922년, 국립음악원에서 그에게 배운 윌리엄 암스 피셔가 2악장 라르고의 선율에 가사를 붙였다. 제목은 고잉 홈, 집으로 돌아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교회에서 불리고 장례식에서 불리며 영가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시간이 지나자 많은 사람이 순서를 거꾸로 기억하게 되었다. 드보르자크가 옛 영가를 교향곡에 옮겨 적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사실은 반대였다. 그가 영가를 빌린 것이 아니라 영가가 그의 선율을 빌렸다. 외국인이 쓴 주제가 그 땅의 전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전통 행세를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삼 년이 남긴 것은 악보 몇 편이 아니었다. 원장실에서 노래하던 청년 버레이는 훗날 사백오십 편이 넘는 노래를 편곡하고 작곡했으며, 그가 무대에 올린 영가는 농장과 민스트럴 쇼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연주회장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같은 학교에서 그에게 배운 루빈 골드마크는 훗날 거슈윈과 코플런드를 가르쳤다. 유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의 발언이 하루 만에 대서양을 건너 빈과 베를린의 음악가들에게 답변을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민족적인 것이 그 시점에 이미 유럽 음악계의 현안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후 삼십 년 동안 시벨리우스가 핀란드에서, 야나체크가 모라비아에서, 바르톡이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의 마을을 돌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편 드보르자크를 미국으로 데려온 돈은 무너지고 있었다.

1893년 5월, 그가 교향곡 총보의 마지막 장을 쓰던 무렵 뉴욕 증권거래소가 무너졌다. 그해 여름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이듬해 6월까지 백스물다섯 개가 넘는 철도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실업률은 이십 퍼센트에 육박했다. 미국이 그때까지 겪은 최악의 불황이었다.


이 시기 미국 예술의 재정 구조는 단순했다. 국가 지원이 없었고, 공적 기금이 없었고, 오케스트라도 오페라단도 음악원도 부유한 개인 몇의 주머니에 매달려 있었다. 그 구조는 후원자가 건재한 동안에는 유럽의 어떤 왕실보다 관대했지만, 후원자가 무너지는 순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서버 집안의 재산은 식료품 도매업에 묶여 있었다. 도매업이 흔들리자 음악원이 흔들렸다. 1894년 드보르자크의 연봉은 팔천 달러로 깎였고, 그마저도 제때 들어오지 않았다.


1894년 1월 23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홀에서 열린 연주회는 이 두 사정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음악원이 주최했고, 공황으로 겨울을 나기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옷을 보내려는 신문사 캠페인을 후원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오케스트라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았고, 합창단은 전원 흑인이었다. 그의 흑인 제자가 쓴 관현악곡이 연주되었고, 마지막 순서는 그가 편곡한 포스터의 옛 노래였다. 독창은 버레이와 당대 최고의 흑인 성악가 시시레타 존스가 맡았다. 그가 뉴욕에서 하려던 일의 축소판이 그 무대 위에 다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성사시킨 명분은 불황이었다.


1895년 봄에 드보르자크는 결국 미국을 떠났다. 계약서상으로는 한 학년이 더 남아 있었고 서버는 그가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그해 여름 고향에서 그와 아내는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밀린 급여가 있었고, 유럽에서 그의 위상은 높아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컸다. 미국에서 쓴 마지막 대작인 첼로 협주곡을 안고 돌아간 뒤, 그는 오히려 더 체코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보헤미아 설화를 가져다 교향시를 썼고, 물의 정령이 인간을 사랑해 목소리를 내주고 뭍으로 올라오지만 끝내 그에게 닿지 못하는 이야기로 오페라 루살카를 썼다.


서버의 학교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끝까지 연방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립음악원을 주장했지만 학교는 워싱턴에 이르지 못했고, 1920년 무렵에는 기능을 멈췄으며, 뉴욕주가 공식 폐교를 선언한 것은 1952년이었다. 그동안 1904년에 인가를 받은 경쟁 학교가 자리를 잡았고, 그 학교는 지금의 줄리아드이다. 국가가 예술을 바카라임져야 한다고 주장한 학교가 사라지고, 개인의 재산으로 세운 학교가 살아남았다.


작곡가가 자기 어법을 갖는 것은 모국어의 억양을 갖는 것과 같다. 외국어를 아무리 정확하게 구사해도 억양은 남는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출신의 증거이고,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표식이다. 보헤미아의 음악이 그렇고, 러시아적인 음악이 그렇고, 피아졸라의 아르헨티나가 그렇다. 작곡가들이 자기 어법을 민족적인 것에서 찾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정한 지역에서만 쓰이는 음계, 그 지역의 춤에서 나온 리듬, 그 땅에서만 만들어지는 악기가 몸에 들어와 억양이 된다. 기후와 지형이 생활양식과 건축과 사고방식을 갈라놓듯이, 소리에도 같은 힘이 작용한다.


드보르자크는 자기 어법을 늘 찾아다닌 작곡가였다. 체코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는 민속적인 것에서 자기가 찾던 것을 발견했고, 그 어법이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가 뉴욕에서 찾아낸 것은 미국의 소리가 아니라 어떤 소리 앞에서도 자기 것을 알아보는 귀였다. 그 귀는 1893년 겨울 저녁의 원장실에 있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학생에게 청하면서. 다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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