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의 비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by크로마

1741년 8월 22일, 런던 브룩 스트리트 25번지. 쉰여섯 살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새 오라토리오의 첫 페이지에 날짜를 적었다. 그는 작업 속도를 스스로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악보에는 이후의 날짜들이 차례로 남아 있다. 1부 완성 8월 28일, 2부 완성 9월 6일, 3부 완성 9월 12일,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마친 최종 완성 9월 14일. 두 시간 반 분량의 음악인 《메시아》는 이렇게 24일 만에 세상에 나왔다.


우리는 이 24일 때문에 《메시아》에 더욱 감동한다. 하늘이 받아쓰게 한 음악이자 인간의 속도가 아닌 속도였다. 헨델이 「할렐루야」를 쓰던 중 눈물을 흘리며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 합창이 울릴 때 우리는 인간의 솜씨가 아닌 무언가를 들었다고 느낀다.


모차르트 앞에서도 우리는 같은 자세를 취한다. 작품 전체가 머릿속에서 완성된 그림처럼 한눈에 보이며 자신은 그것을 옮겨 적을 뿐이라는 편지와 수정 흔적 없이 깨끗한 자필 악보들이 그 물증처럼 인용된다. 살리에리처럼 평범한 우리 인간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모차르트를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신의 고결한 창조물로 바라본다. 문제는 일필휘지로 쓰였다는 그 작곡 방식을 증언하는 편지가 가짜라는 것이다. 모차르트 사후 독일의 음악 저널리스트 프리드리히 로흘리츠가 발표한 이 편지는 오늘날 학계에서 위작으로 판정되어 있다. 위조된 렌즈 하나가 이백 년 동안 한 작곡가를 읽는 안경 노릇을 해온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짜 문서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785년 모차르트는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를 출판하면서 요제프 하이든에게 바치는 헌정사를 직접 썼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길고 고된 노력의 결실"이다. 위작이 아니라 모차르트 본인의 육성이다. 하늘의 받아쓰기가 아니라 고된 노력이라 불린 이 여섯 곡은 완성까지 3년 가까이 걸렸고 자필 악보에는 그답지 않게 고쳐 쓴 흔적이 빼곡하다.


모차르트는 이 사중주를 익숙한 언어로 쓰지 않았다. 하이든이 개척한 현악사중주의 새로운 어법, 네 개의 악기가 대등하게 대화하는 방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중이었다. 낯선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고쳐 쓸 수밖에 없다. 천재라 하더라도 그 시간을 건너뛸 수 없는 것은 낯선 것을 제 것으로 가져오는 데에는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능의 크기와 무관한 낯섦 자체의 속성이다. 모차르트의 재능이 아무리 커도 그 법칙 바깥에 있지 않았다. 깨끗한 악보는 그가 이미 정복한 영역의 기록이고 고친 흔적은 그가 지금 정복하는 중인 영역의 기록이다. 천재의 예외성이 아니라 한 장인이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로 가는 중인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그 여섯 곡의 마지막 작품이 오늘날 '불협화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중주다. 느린 서주 스물두 마디가 조성의 안갯속을 더듬듯 나아가는 이 도입부는 당대의 귀에 음악이 아니라 오류로 들렸다. 악보를 받아 든 이들이 인쇄가 잘못됐다고 여겼다거나 이탈리아의 연주자들이 '틀린 음'을 고쳐서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명한 작곡가 사르티가 이 곡을 두고 야만적이라는 취지의 혹평을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시대인들이 오류로 착각할 만큼 그는 관습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낯선 것을 제 것으로 만들려는 이 실험은 에디슨의 도전기와 닮아 있다. 고치고 또 고치며 배우기를 반복한 것이다. 1782년 4월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일요일마다 판 슈비텐 남작의 집에 가는데 그곳에서는 오직 바흐와 헨델만 연주한다고 편지를 쓴다. 반세기 전의 대위법 앞에서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닌 스물여섯의 작곡가가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푸가를 필사하고 습작했으며 그 습작의 상당수를 미완성으로 버렸다. 모차르트 연구자 울리히 콘라트가 정리한 자료에는 이런 미완성 단편이 백 편 넘게 남아 있고 이 시기의 푸가 습작들이 거기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구를 만들기까지 수없이 실패한 필라멘트를 버렸다는 에디슨의 이야기를 우리는 발명가의 미덕으로 소비한다. 모차르트의 바카라상 위에서도 수많은 습작이 태어났다 스러졌으나 그쪽의 폐기물은 신화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버려진 푸가들의 퇴적 위에서 하이든 사중주의 대위법이 나왔고 훗날 주피터 교향곡의 피날레가 나왔다. 그 인연은 뒷날 실무로 이어진다. 1789년 모차르트는 판 슈비텐의 위촉을 받아 헨델의 《메시아》를 빈의 편성에 맞게 편곡했다.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이 장의 두 주인공이 실제로 만나는 지점이다.


1741년의 헨델은 그때까지 40편이 넘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사람이었다. 올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페라 극단을 직접 운영했다. 가수를 섭외하고 개런티를 협상하고 티켓 판매를 계산하고 시즌이 실패하면 손실을 떠안았다. 실제로 그의 오페라 사업은 여러 차례 기울었다. 런던 관객이 이탈리아어 오페라에 흥미를 잃어가는 것을 그는 객석의 빈자리로 장부의 숫자로 감지했다. 영어 오라토리오로의 전환은 종교적 회심이 아니라 시장 판단에 가까웠다. 관객이 무엇에 지루해하고 무엇에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지를 그는 이론이 아니라 손익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메시아》의 내부에는 이 경력이 그대로 들어 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다」의 경쾌한 주제는 그가 불과 몇 주 전에 작곡한 이탈리아어 세속 이중창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는 노래가 구세주 탄생의 합창이 되었다. 「그의 멍에는 쉽다」 역시 같은 시기 이중창을 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일이라는 시간 안에는 이미 무대에서 검증을 마친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헨델은 24일 동안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30년 치의 재고를 최적의 형태로 재조립했다.


모차르트의 계산서도 다르지 않다. 그는 서른다섯 해의 생애 가운데 대략 3분의 1을 여행길에서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순회공연이었다. 여섯 살부터 그는 유럽의 궁정과 극장에서 관객 앞에 앉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직접 초연했고 건반 앞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으며 오페라 리허설에서 가수들과 부딪히며 아리아를 고쳤다. 1781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아리아란 잘 지은 옷처럼 가수의 몸에 꼭 맞아야 한다고 썼다. 옷을 몸에 맞추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 음악이 객석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평생 실시간으로 확인해 온 사람이었다.


인지심리학자 존 헤이스는 저명한 작곡가 76명의 작품 목록을 분석한 적이 있다. 오늘날까지 연주되는 걸작이 경력 몇 년 차에 나오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결과는 냉정할 만큼 일관됐다. 그가 추린 500여 곡의 걸작 가운데 경력 10년 이전에 나온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모차르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연주회장에서 듣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이미 십수 년의 무대를 통과한 뒤의 것들이다.


그들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끊임없는 추진력, 다음 마디로 몸을 당기는 힘의 정체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객석의 공기를 아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관객이 숨을 참고 어디서 박수가 터지는지를 수백 번의 공연으로 몸에 새긴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리듬이며 어디서 관객이 황홀해하는지를 알아채는 섬세한 감각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재능이 경험 위에서 꽃핀 것을 '영감'이니 '천재'니 '무아지경'이니 하는 말로 뭉뚱그릴 때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살아낸 생애를 지우고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 이 감각은 음악의 내용까지 바꿔놓았다. 1781년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을 박차고 나와 빈에서 프리랜서가 되었다. 고용주 없이 예약 연주회와 악보 출판과 레슨으로 생계를 꾸리는 음악가로, 당시로서는 낯선 지극히 근대적인 존재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관객을 상대로 십 년에 걸친 탐색을 시작한다.


이듬해 그는 독일어로 노래하는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를 빈의 부르크극장에 올렸다. 요제프 2세가 이탈리아어 대신 자국어 무대를 세우려 추진하던 시기였고 모차르트는 그 흐름 위에 올라탔다. 1784년에는 프리메이슨 지부에 입회했다. 신분이 아니라 이성과 덕성으로 사람을 가늠하겠다는 이 결사는 계몽의 이상이 모이던 장소였고 그는 그곳을 위한 음악을 여러 편 남겼다. 1786년에는 더 위험한 선택을 한다. 귀족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빈에서 연극 상연이 금지되어 있던 보마르셰의 원작을 대본가 다 폰테와 함께 정치적 날을 다듬어 오페라로 통과시킨 것이다. 하인이 주인을 이기는 이야기가 황제의 극장에서 노래로 울렸다. 그는 시대의 공기를 읽으면서 동시에 그 공기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무대마다 시험하고 있었다.


《마술피리》는 그 십 년의 끝에 있다. 1791년 궁정의 위촉이 아니라 흥행사 쉬카네더와 손잡고 빈 변두리 대중 극장에 올린 이 작품의 언어는 귀족의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시민의 독일어였다. 무대 위에서는 새 잡이 광대가 노래하는 사이로 계몽의 이상이 흘렀다. 시련을 통과해 스스로 빛에 이르는 인간, 신분이 아니라 내면이 인간을 결정한다는 이 오페라의 전언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열 해 동안 자국어 무대를 시험하고 계몽의 결사에 몸담고 검열의 경계를 두드려본 사람이 마침내 도달한 자리였다. 모차르트는 시대정신을 음악에 담기 이전에 그 시대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로 확인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신화는 누가 만들었는가. 모차르트 본인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작품을 고된 노력의 결실이라고 불렀다. 신화는 그가 죽은 뒤에 왔다. 낭만주의는 노동하지 않는 창조자의 표상을 필요로 했고 모차르트가 거기에 캐스팅되었다. 로흘리츠의 위조 편지는 그 수요에 공급된 상품이었다. 실제의 살리에리는 빈 궁정악장의 자리에 오른 성공한 음악가였으나 노력하는 범인과 노력 없는 천재라는 구도가 희곡과 영화를 거치며 상식으로 굳는 동안 그는 질투의 화신이라는 배역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같은 시간 3년에 걸린 사중주와 버려진 푸가들과 고쳐 쓴 악보들은 조용히 서고로 밀려났다.


24일의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헨델의 악보에 적힌 날짜들은 기적의 기록이 아니라 회수의 기록이다. 30년 동안 무대에 지불한 시간이 24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그 숫자 앞에서 천재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정작 그들이 평생 한 일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백 번 막을 올리고 실패한 시즌의 장부를 덮고 낯선 어법 앞에서 악보를 고치고 또 고치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메시아》는 24일 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그 24일이 시작되기까지 헨델은 30년을 걸었다.


신화를 걷어낸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를 나는 오래 생각했다. 남는 것은 초라해진 음악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선율은 여전히 마음에 미풍을 불어오고 헨델의 리듬은 어떤 음악보다도 가슴을 뛰게 한다. 다만 이제 그 감동의 출처가 달라졌을 뿐이다. 하늘이 불러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을 들여 도달한 자리라면 그 음악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대신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온다. 경외는 줄지 않았고 오히려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이제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그 재능이 지나온 시간에 경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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