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녀, 어둠 속에서 날 구해준 존재

ep27 지옥을 탈출한 여자

by윤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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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쁜 손녀. 빛나야. 이제 행복해야해.”


옥상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는다. 까맣고 주름진 손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제 끝났구나. 이번 생은 망했구나. 절망에 빠져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괜찮다고. 하얗게 흩어진 빛 사이로 포근하게 날 안아준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 드디어 알았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뜨겁게 사랑했던 첫사랑과 아쉽게 헤어지는 사람처럼. 유난히 촉촉한 눈망울로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서도준씨와 재회하고. 온몸에 긴장이 풀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잤다. 꿈에서 깬 뒤 한참을 울었다. 온몸은 땀으로 다 젖어있었다. 베개도 눈물로 축축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뒤덮었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오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날 끊임없이 구해주고 있었어.”


서도준씨와 다시 만난 날. 난 다짜고짜 할아버지 얘기를 시작했다. 서도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날 쳐다봤다. 맥락도 서사도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뭐라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날 구해준 것 같다고.


“갑자기 그런 느낌을 왜 받은 거야?”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유를 물었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을 때.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려 우울증에 걸렸을 때. 트라우마 치료로 마음을 다쳤을 때. 순간순간마다 내게 좋은 일들이 생겼다.


연봉을 올려 이직하거나.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거나. 친구들과의 사이가 멀어질 때쯤엔 서도준씨가

‘짠’하고 나타났다. 공백이 없었다. 물론 우연일 수 있겠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잘 짜여진 각본 같았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는 느낌이 들어.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고. 오빠를 만나게 해준 것도 포함이야.”


서도준씨는 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망진창으로 설명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듣는 느낌이랄까.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것 같은 우리 관계에서는. 자세한 설명도. 구체적인 정황도 필요 없었다. 그냥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빛나를 많이 예뻐했구나.”


할아버지에게 난. 아픈 손가락 같은 손녀였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아. 항상 몸이 안 좋았고. 몸에 좋다는 건 어디선가 수소문해 구해줬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날 사랑해줬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이별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할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사람 조심하라고. 특히 남자 조심하라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에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그게 유언인 줄도 모르고. 하얀 봉투에 ‘할아버지 사랑해요. 건강하세요’를 적은 메시지와 함께. 용돈을 건네고. 그렇게 헤어졌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안 보였는데... 그냥 할아버지인 걸 알았어.”


살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서도준씨는 꽤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멍해졌다. 지금껏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빛나가 좋은 사람이라서... 하늘에서도 온 힘을 다해 구하고 싶었나봐.”


좋은 손녀가 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내 곁에 없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난 과분한 사랑 속에서 자랐다는 걸. 인생이 참 잔인한 게. 나를 많이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의 사랑을 돌려주지 못 한다.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됐을 때쯤엔. 소중했던 누군가는. 예고도 없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내 곁을 떠난다.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이혼한 후 서도준씨를 만나고. 난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잔잔하게 흘러가는 나날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 잘 느껴져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대했다. 지옥이 없었다면. 이런 황홀한 느낌도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빠. 난 이제 그냥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살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누군가의 간절함으로 내가 다시 살아남았다면. 있는 힘껏 행복하게 살자. 어떤 경우에도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후회 없이 살아가자.


“나도 빛나를 만나고 난 이후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우린 서로 추상적인 말들을 했지만. 서로가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말로 직접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황홀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 사람이 날 외롭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결혼하고. 삶에 치일 때쯤. 사랑의 형태가 다르게 변할 수 있겠지만. 힘든 순간이 와도 지금의 감정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린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인 만큼 서로를 더 소중히 대할 것이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려는 찰나. 서도준씨는 내게 물었다.


“빛나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어?”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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