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 지옥에서 탈출한 여자
“빛나야, 술 냄새가 아직도 역겨워?”
지옥에서 탈출해 안정을 찾았지만. 트라우마는 끝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술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미세한 술 냄새를 풍기는 것도 역겹게 느껴졌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온 몸에서 땀이 났다.
머리로는 위험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몸이 덜덜 떨렸다. 지나가다 누군가 술에 취해 큰 소리를 내거나. 싸우거나. 문을 두드리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기라도 하면. 온몸이 굳는 것처럼 경직됐다.
하루는 지하철을 타다가. 술 취한 남자가 나를 툭 치고 갔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다음 칸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 짧은 시간에도 눈앞이 희미해지는 듯한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날 목적지가 아닌 역에 내려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호흡이 잘 안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이런 게 바로 공황장애라는 걸까. 계속 생각을 돌리려고 하고. 정신과 선생님이 알려줬던 호흡법을 떠올려봤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공포가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언제든지 목을 조르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 있구나. 어쩌다 내게 이런 시련이 온 걸까. 어쩌다.., 이렇게 까지 예민한 사람이 됐을까 나는. 살면서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는 내게 얘기했다. 시간 지났는데 그냥 잊어버리고 잘 살면 안 되냐고. 이론상으로는 맞는 말인데. 몸은 아직도 술 냄새를 맡으면 위험을 계산했고, 소리가 들리면 탈출구를 먼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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