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녀가 찾은 ‘진짜 인연’의 의미

ep26 지옥을 탈출한 여자

by윤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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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야. 보고싶어...”


도망치듯 서도준씨에게 벗어나 뛰어왔지만. 우리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처음 사귀기 전 무당이 우리에게 했던 말처럼.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결혼은 현실이니까. 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그가 없는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매일 문자를 보냈다. 카톡도 아닌 문자로. “보고싶다”고 말했다. 4글자의 짧은 문자 속에서도 그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뭔가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같이 떠나고 싶다고. 엉뚱한 상상도 해봤다. 하지만 선뜻 무언가를 할 용기는 안 났다.


서도준씨를 못 본지 5일쯤 됐을까. 그날은 또 다른 문자가 왔다.


“빛나야. 집 앞에 왔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게.”


내려갈까 말까 고민도 하기 전에.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뛰어가듯이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며칠 사이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그가 내 앞에 있는 게 뭔가 꿈 같았다.


서도준씨는 늘 그랬듯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그의 품에 파묻혀.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엉엉 울었다. 마음이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을까. 서도준씨가 없었을 때도 분명 잘 살아낸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빛나야 왜 말 안 했어? 우리 엄마 만났었다며...”


그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아니 어디까지 아는 걸까. 설마 내게 돈 봉투를 내민 것도. 알고 있는 걸까. 순간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괜히 그런 것 까지 말하지 말자.


“어머니 입장에서는... 오빠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아서... 차마 말할 수 없었어.”


내가 생각해낸 가장 담백한 대답이었다. 같은 여자로써 그의 어머니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절대 안 좋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도준씨가 내 아들이었다고 가정해도. 난 백 번도 더 말렸을 거다.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서 더 공감됐다.


“빛나야. 우리 엄마 말 때문에 그만하자고 한 거면... 그건 내가 해결할게.”


뭔가 굉장히 서도준씨다운 답변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자체는 너무 고마운데. 이게 해결 가능한 일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돈 봉투도 내밀었다고 들었어... 그런 상황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돈 봉투’라는 단어만 놓고 보면 되게 자극적일 수 있지만. 아침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근데 그건... 드라마 속에 나오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서도준씨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언젠가 서도준씨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나보다 인간적으로 훨씬 더 나은 사람 같아서’였다. 뭔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는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한다면. 평생 안정감 있게 살 수 있겠다는 그런 확신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것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난 지금껏 이루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이루기 시작했다. 딱히 내 능력이 특출나서는 아니었다. 그가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영향이 컸다.


“빛나야... 너랑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어. 부모님은 내가 잘 설득해볼 테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해결해보자.”


그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막막했다. 솔직히 미움받을 용기가 안 났다. 서도준씨 부모님께 잘 보이겠다고 애쓸 힘도 없었다. 수년간의 고통 속에 지친 나에게.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서도준씨와 헤어질 자신은 없었다. 그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이 남자를 놓치면. 더 좋은 남자는 물론이고. 인생을 함께 걸어갈 누군가를 만나기 힘들 것 같았다.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안정된 이 느낌이. 나를 숨쉬게 했다.


“오빠... 이 상황을 극복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오빠랑 영영 헤어질 자신도 없어... 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마음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았다. 서도준씨를 만난 시간만 놓고 보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느낌이었다. 작정하고 거짓말을 해도 속일 수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 말했다.


“빛나야. 지금 이 문제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문제 중에 하나일 뿐이야. 같이 머리를 맞대고 잘 극복해보자.”


그의 확신의 찬 목소리에. 짧은 공백이 무색하게.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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