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옹이

by낮달

소설을 쓰겠다고 겉멋이 들어 있던 스무 살 무렵, 나는 줄곧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또 억울했다.


위대한, 혹은 처절한 서사에는 으레 그늘 깊은 아버지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개칠 몽둥이도 없는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 뒷산에서 독일셰퍼드를 굽던 어느 소설가의 아버지만큼 애잔하거나, 최소한 지리산 어귀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남로당의 붉은 완장이라도 찼다가 평생을 사상범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 정도는 되어 주기를 내심 바랐다. 그래야만 내가 쓰는 글에 핍진한 비극이 깃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1933년생 담양 전씨(潭陽田氏) 27세손 전성수(田星秀)의 삶은, 나의 얄팍한 문학적 허영을 채워주기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맹물이었다.


우리 집안의 족보는 꽤 스펙터클하다. 동학농민혁명 때 좌즉죽산 입즉백산(坐則竹山立則白山)의 선봉에서 전봉준과 함께 죽창을 치켜든 23세손 전효복이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전명운 의사가 아버지와 항렬이 같은 27세손이다.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리며 임금을 희롱했다는 도사 전우치도 우리 가문의 15세손이다. 거기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에 바카라록되어 품계가 1품에 오른 환관 전균. 죽창을 든 혁명가, 방아쇠를 당긴 의사(義士), 구름을 탄 도사, 그리고 1품 환관. 혁명도 하고, 독립 전쟁도 하고, 쿠데타도 도왔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바람을 부리기는커녕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에 평생을 바쳤고, 총이나 죽창 대신 끝이 닳아빠진 호밋자루와 조선낫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그는 뼛속까지 자경농(自耕農)이었다. 다정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고, 말수는 지독히 적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도록 아버지와 나눈 대화라곤 “밥 먹었냐.”, “다녀오겠습니다.” 따위의 건조한 문답 몇 개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 소설의 소재가 되기엔 너무도 평범했고, 지독하게 고요했다.


그 무렵 나는 바카라과 가난 속에 있었다. 8학기를 장학금으로 버텼고, 생활비는 과외나 학원 강의로 겨우 마련했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시와 비평을 이야기하던 것이 삶의 전부였다. 그런 내 눈에 아버지는 언제나 평평했다. 드라마가 없었다. 내가 뜨거운 논쟁의 지면 위에서 싸울 때 아버지는 소똥이 묻은 장화를 신고 밭으로 나갔다. 집에 오면 밥을 먹고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목침을 벤 채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다. 그게 아버지의 하루였다.


아버지의 형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육 형제 중 다섯섯째인 아버지의 위로 형 넷이 일제강점기 말엽 학병으로 끌려갔고 둘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 아버지가 군대에 가기 전 혼인을 했었다는 것도, 친척 어른들의 취중 진담에서 얼핏 주워들었다. 징집영장을 받고 떠났던 청년이 화약 냄새 나는 군복을 입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내의 싸늘한 무덤이었다는 것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침묵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그 맹물 같은 침묵이 사실은 수백 번 끓어올랐다 식어버린, 지독하게 농축된 옹이 같은 흉터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다.


아버지는 슬하에 7남매를 두었으나 딸 둘을 어린 나이에 앞세웠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다만 선산의 어느 자락에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식들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안다. 아버지는 그 자리를 몇 번이나 혼자 찾아갔을 것이다.


아버지는 남로당이나 남부군 같은 거창한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속수무바카라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흙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그 지독한 무력감 때문에 평생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흙을 파고, 또 팠다. 머슴살이와 나무장수로 시작해 악착같이 흙에 매달렸다.


스무 살의 나는 그것을 서사로 읽지 못했다. 비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 선산에는 아버지와 두 어머니, 이렇게 세 분이 함께 모셔져 있다.


(계속)

표지사진은 라이테 작가님의 글 ‘아버지의 등’에서 모셔 왔습니다. 작가님 아버님의 등이, 꼭 평생을 땅만 일구다 가신 제 아버지의 등처럼 보여 오래 마음이 쓰였습니다. 사진을 허락해 주신 라이테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