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소개하고 싶지 않아

by기만

꿈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수도 없이 고민하지만 고민의 끝은 언제나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온전히 채우지는 못한다는 사실로 향한다. 그래서, 그조차도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채우지 못한 틈이 또 다른 꿈 하나가 들어갈 만큼 커지더라도 애써 모른 척하고 사는 것이다. 숨 쉬고 사는 데에는 그런 의무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고민의 줄을 손에서 놓아버리고는 그 손으로 열심히 지원서를 작성한다. 뭘 그리 많이 캐묻는지, 써 내려간 어떤 문장도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한 경험에 대해 묻는다. 질문의 의도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조언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쉽사리 쓸 수 없다. 물길에 깎이고 깎여 평평해져버린 강가의 돌덩이처럼 너무 반듯해서, 굴곡이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손톱 끝에 걸리는 느낌으로 어떤 패인 부분을 찾으면, 이까짓 걸 위기라 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더러워진 손톱으로, 실수로부터 얻은 교훈이라 쓴다. 꽤 괜찮게 방어해 냈다고 둘러댄다. 지금이 가장 큰 위기다.


열정이라 쓰면 안 된다. 역량이라 써야 한다. 노력했다 쓰면 안 된다. 달성했다 써야 한다. 바카라임감이 아니다. 오너십이다. 다 쓰는 법이 있다. 그래야 면접에라도 갈 수 있다. 내 공백기에 대해 물어볼 면접관에게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도 준비되어 있다.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답변, 그게 당연하다는 건 면접관도 알고 있다. 그래도 질문한다. 나는 대답한다. 사실 공백기에 별로 한 것이 없었지만, 나는 대답한다. 대답하려면 열정이라 쓰면 안 된다. 역량이라 써야 한다.


인사담당자도 지쳤다.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AI가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AI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 그렇기에 더 초라해 보이는 내 이력서, 이력서를 더 예쁘게 꾸며야 한다. 형광펜을 칠하고 스티커를 붙이는 데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을 알지만, 질 수 없다, 내가 외운 영어 단어를 자랑하고, 내가 날린 고무동력기를 자랑한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업로드 버튼을 눌러본다. 깜빡이는 로딩 바를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직감한다, 나의 건승을 기원하는 문자 메시지를 곧 받아볼 수 있음을. AI에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았다.


나도 지쳤다. 마치 늘 보여주고 증명해야만 하는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는 핑계로 포기한들, 할 수 있는 건 없다. 꿈이 사라진 자리, 그 틈에 무엇이라도 밀어 넣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저버릴 수 없는 의무, 실수로부터 배운 건 무엇이었는지 고쳐 써야만 하는 의무. 보잘것없는 손톱 때였을지언정 그것마저도 증명해 내야 하는 의무. 돌덩이는 왜 평평해졌는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점점 내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찾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다시 나를 찾아 나섰다. 그건 안전한 공간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 가득 칠해진 브랜드 간판이었을까,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찾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 대가, 그래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기회비용인 거라며 주절거렸다. 틈을 채우겠다며 떵떵거렸다, 모른 척하지 않겠다, 어떻게든 사는 게 인생인 거라 떠들어댔다.


계속 모른 척했어야 했나,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도 쓸모없는 사람의 것이라 여겼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로만 살 수는 없었던 걸까,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나서 나를 이런 세상에 내몬 것이 무엇이었는지 원망하기 위해 잠시 버둥댔지만, 부끄러움만이 남을 뿐이었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하면 될 수 있거나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되고 싶은 모습이 희미해져버린 지금에도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철없는 아이, 아직도 철없는 아이로만 살고 있구나.




이건 잘 보이고 싶어서 쓰는 자기소개서가 아니다―나는 무능력하다 경력도 경험도 자격증도 상장도 성적도 성격도 말투도 행동도 별 볼 일 없다 쓸만한 사람이 아니다 배운 것도 가르친 것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이건 모른 척하고 쓰는 자기소개서다―나는 출중하다 경력도 경험도 자격증도 상장도 성적도 성격도 말투도 행동도 대단히 특별하다 쓸만한 사람이다 배운 것도 가르친 것도 누구보다 뛰어나다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회사도, 인사담당자도, AI도, 나도 모두 지쳤다. 어디에도 맞지 않고 어디에도 맞출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 인생에 대해 심사하려고 한다. 이번엔 지금의 실패에 대해 쓰라고 하면 되는 것인가.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면 되는 것인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인생을 살고 있다. 쓸 수 없는 말.





월, 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