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눈부시진 않았다. 고등학생이던 그는, 사랑을 잘 몰랐다. 불그스름한 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는 사랑을 잘 몰랐다. 그 아이가 다른 여자애의 손을 잡고 나타나서는 싱그런 표정과 발걸음으로 그를 뒤로 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사랑을 잘 몰랐다. 심장이 떨리고 갑자기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사랑을 잘 몰랐다. 그는 사랑을 알아도 되는지 잘 몰랐다.
그는 마음을 터놓는데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엔가 차창 밖 청명한 밤하늘과 평범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나도 할 수 있어, 바뀔 수 있어, 스스로 세뇌했다. 그는 제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관심은 평범해지는 것, 그뿐이었다. 그 관심이 스스로를 벽장 속에 가뒀다.
그가 더 어렸을 때 다른 행동거지, 다른 태도와 다른 성격은 그들의 슬롯에서 놀림감이었다. 틀린 행동거지, 틀린 태도와 틀린 성격. 그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한 겹 더, 한 치 더 깊숙이 벽장 속으로, 스스로를 가뒀다. 가면 위에 한 겹 더 가면을 썼다.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면 한 겹 더 썼다. 그래,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세뇌했다.
그래서 몰랐다. 알아도 모르는 것이어야 했다. 좋아하는 아이가 무심코 얹은 손, 해맑은 표정과 뱉은 말에 묻어나는 친절이 좋았지만, 몰랐다. 우리는 좋은 친구. 집으로 향하려면 환승역에서 그 아이와 헤어져야 했음에도 기꺼이 더 오래 걸리는 길을 택했고, 그렇게 얻은 삼십 분 남짓의 시시한 농담의 시간이 좋았지만, 몰랐다. 우리는 좋은 친구. 그는 쇼팽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아이가 연주하는 곡만큼은 싫지가 않았는지, 그 아이가 연습하고 있을 때의 몰입하는 손짓과 표정을 보며 덩달아 즐거워했지만, 몰랐다. 우리는 좋은 친구. 반짝이는 눈, 졸린 눈, 즐거운 눈, 괴로운 눈까지 전부 다 그의 눈에 담으려 했지만, 몰랐다. 모르는 것이어야 했다. 우리는 좋은 친구.
성인이 된 그는 첫사랑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또다시 '친구'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자기 차를 몰고 다녔다. 그는 그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등교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에 월세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기에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그 친구의 권유를 받고 꽤나 신이 났다. 이른 시간에 수업을 들으러 학교까지 가는 게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다. 어차피 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 편리하고 즐거웠다.
비가 오는 날, 다음 수업에 가기 싫다고 괜히 비를 탓할 때면 그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좁은 공간에 주차하고 내려서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산 나눠 마실 음료나 먹을거리를 손에 들고 함께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딱 두 사람만 결석한 수업, 사유는 비. 반짝임이 쏟아지는 날, 아무리 치워내도 어쩔 수 없어, 그 차의 와이퍼가 강하게 요동치는 만큼 일탈이 더 즐거워짐을 느꼈다. 네가 차가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운전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사실 운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날이 맑아지지 않기를, 해가 뜨지 않기를.
종종 함께 술을 마셨다. 단둘이서는 아니었다. 학과에서 마련한 모임,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모임, 동기들과의 모임, 선배들과의 모임...... 그는 늘 그 친구가 참석할 것인지 궁금해했고,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꼭 같이 따라갔다. 옆자리에 앉아도, 다른 자리에 앉아도 퍽 신경 쓰였다. 소주 한 모금, 맥주 한 모금, 푹 빠져 있는 공부 얘기, 지루한 수업 얘기, 이상한 말투를 가진 선배에 대한 얘기, 그러다가 사랑 얘기. 그 친구는 곧잘 맞장구를 치며 호탕하게 대화했지만, 자신의 연애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런 점도 좋아했다. 자신을 뒤로하고 다른 여자애의 손을 잡고 떠난 첫사랑 생각은 이제 나지 않았다. 그 친구가 미소를 지으면 덩달아 그의 입꼬리도 움직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다시 소주 한 모금, 맥주 한 모금.
아침식사를 자주 걸렀기에,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곧장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다른 동기들은 각자 약속이 있다거나 바로 다른 수업에 가야 한다며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와 그 친구는 둘이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그가 반찬을 뒤적거릴 때 그 친구는 핸드폰의 알림을 확인하며 무덤덤히 말했다. 여자친구가 보낸 메시지라고 말했다. 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자친구'라는 네 글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여자친구'라고? 그는 적잖은 충격에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이내 식당의 다른 사람들 말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때 식당은 매우 붐비고 시끄러웠다. 그는 덩달아 시끄러워진 속을 온 힘으로 누르며 평온한 듯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냐고 되물었다. 그 친구는 '여자친구'에 대해 같은 학교 학생이자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이라 소개하고, 서로 마음에 들어 얼마 전부터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사실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첫사랑, 아니 첫사랑을 경험했던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캠퍼스 안에서 걷다가 마주친 그 친구가 '여자친구'와 붙잡고 있던 손을 떠올렸다.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씁쓸함을 뒤로하고 생각했다. 만약 언젠가 조금이라도 그 친구에게 진심을 드러냈더라면, 딱 한 마디만이라도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덜 후회하게 되지 않았을까? 지금보다는 덜 한심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오히려 어떤 말도 전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어릴 적 '남자답지 않았던' 내 행동과 말투를 두고 놀리던 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아했던 친구가 내비쳤을 수도 있던 경멸의 눈, 혹은 당황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런 얼굴을 보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냥 모르는 것이어야 했다고 또 생각했다. 우리는 좋은 친구.
그는 연애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어릴 적 차창 밖으로 보았던 청명한 밤하늘만 애꿎게 의심했다. 믿지 못하는 것이 밤하늘이었는지 유리창이었는지, 그게 무엇이었는지 보다 싫었던 건 사실 어릴 적과 다른 게 없다는 것이었다. 좋아해, 그 말을 들을 때나 말할 때나 늘 뒤에 붙는 것도 의심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자주 지각하는 내 나쁜 습관을 지적하는 네가 미워질 리 없어, 첫 연애의 끝은 그 의심에서 비롯됐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군대에서 공용 전화기로 매일 거는 내 전화를 네가 무시하지 않을 리 없어, 두 번째 연애의 끝은 그 의심에서 비롯됐다. 너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면 1주년 기념일에 근사하지 않은 식사 자리로부터 느낀 이 권태를 우리가 견디지 못할 리 없어, 세 번째 연애의 끝은 그 의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데 늘 자신이 없었다. 그는 사랑에 여러 층위가 있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찾아온 많은 인연들을 밀어냈다.
누가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그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었을까? 답답했던 그는 처음에 모든 것의 원인을 그가 게이인 것으로 돌렸고 이후에는 그를 힘들게 했던 타인들에게 돌렸다. 깨질수록 더 단단해지는 법, 너도나도 미숙했던 청소년기에 누구나 그랬듯 마음이 가는 대로 좋아하고 미워했었더라면, 아니 그래도 되는 것이었다면, 누구나 사랑이 아름다웠다 말하듯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건 다 내 잘못이야, 다 네 잘못이야, 그러다가 그는 나중에 알게 됐다—단단해지지 못했더라도 그냥 사는 사람이 있다.
서른이 훌쩍 넘은 그에게는 이제 사랑이든 연애든, 혹은 그가 게이인 것이든지 아니든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해는 하지만 인정은 못 하겠다는 말에도, 그것 참 다행이려니, 기분은 나쁘지만 이내 무시해버린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때조차도 여전히 어울리는 가면을 찾아 쓰곤 한다. 사랑이, 연애가, 그의 성적 지향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환승역의 갈림길에서, 비 오는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군인들이 줄 서는 공용 전화기 앞에서, 아직 의심과 작별하지 못했더라도, 아직 정말로 내가 게이인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깨닫지 못했더라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자신이 없더라도. 단단해지지 못했더라도 그냥 사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