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안의 거리

말없이 섞이는 시간

by슬로하라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면, 눈을 굴리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시선을 알아채고, 가볍게 묻는다.


Gremo na sprehod?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이미 몸은 먼저 반응하고 있다. 산바카라 도구를 챙기는 동안 그녀는 자기 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는다. 몇 번을 반복해 온 순서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시간을 기다린다.


하루에 두세 번, 길을 나선다.


시작하는 자리와 돌아오는 자리는 같지만, 그 사이의 길은 매번 달라진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늘 조금 느리게 걷는다.


집을 나서 두세 블록쯤 지나면 울타리로 둘러진 풀밭이 나온다. 잔디와 울타리, 그리고 의자 두어 개.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는, 그런 자리다. 조금만 더 걸으면 다른 울타리도 이어진다. 어쩐지 늘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얼굴들이 모인다. 이제는 그곳이 하루 중 한 번쯤 들르는 곳이 되었다.


울타리 앞에 다다를수록 그녀의 걸음은 조금 더 빨라진다. 가볍게 몸을 흔들고, 시선은 이미 안쪽을 향해 있다.


안쪽에는 늘 몇 마리의 개들이 먼저 와 있다. 처음 보는 아이도 있고, 몇 번 마주쳐 익숙해진 아이도 있다. 멀찍이 떨어져 주시만 하는 아이도 있다. 여느 사람들 사이와 다르지 않게, 저마다의 거리와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암묵적인 룰 같은 것도 있다. 울타리 안에 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으면, 작은 아이들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그냥 지나간다. 풀 냄새를 잔뜩 묻힌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미 시작된 흐름 속으로 조용히 끼어드는 기분이 든다. 벤치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자기 아이를 눈으로 좇는 사람도 있고, 옆 사람과 가볍게 몇 마디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이 시간은, 예전의 나에게는 없던 자리였다. 그 안에서 먼저 배운 단어들도 생겼다.


Teci! 달려.

Umiri se. 진정해.


몰랐던 언어가 이 안에서 먼저 익었다.


개들은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람들은 그 뒤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 사이에서 한 발쯤 물러나 서 있는 쪽에 가깝다. 말을 먼저 꺼내기까지는 늘 한 박자가 필요하다. 가끔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문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괜히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별다른 약속 없이도, 그 안에는 이미 오래된 흐름 같은 것이 있다. 눈이 마주치면 짧게 웃거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정도가 전부인 경우도 많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말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음 날 다시 그 자리에 서면, 이미 몇 번은 함께 있었던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대화를 길게 나눈 적도 없는데, 어제의 장면이 그대로 이어진 것처럼.


그렇게 이어지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몇 사람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동안은 반려견의 이름만을 묻고 답하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내 이름을 물었다.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았고, 어디에서 왔는지, 이곳에서 지낸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이곳은 어떤지까지. 길지 않은 질문들이었지만, 그 물음들은 반려견을 지나 나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던 시간이, 그날은 한 발 더 안쪽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이어지던 시간 위에, 짧은 문장 몇 개가 놓인 것처럼. 그 자리는 조금씩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개들도 뛰어놀다 지친 듯 그늘에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말없이, 각자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