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를 보고
『오디세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10년을 떠돈다. 외눈박이 거인을 만나고,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신들의 변덕에 휘말리고, 함께 떠났던 동료들을 하나둘 잃는다.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당연히 모험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괴물이나 신보다 계속 한 단어가 머릿속에 남았다.
집.
오디세우스는 왜 그토록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집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집을 아주 쉽게 정의한다.
내가 태어난 곳.
부모님이 사는 곳.
오래 살았던 동네.
내 주소가 적혀 있는 곳.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집을 설명하는 조건일 뿐, 집 그 자체는 아닐지도 모른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내가 자란 곳이었고 가족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학이 된다고 해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 마음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보면서 오래전의 그 감정이 문득 떠올랐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부모가 산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은 영원히 나의 집이 되는 걸까.
아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떠도는 삶이 오히려 집에 가까울 수도 있다.
정착하면 답답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때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어쩌면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계속 길 위에 있는 상태.
낯선 도시에서 아침을 맞고, 가방 하나를 들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어디에도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않는 삶.
그런 순간에 오히려 가장 자기답다면, 그 사람에게는 떠도는 상태 자체가 집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이라는 것이 갑자기 물리적인 공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집은 꼭 한곳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집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디세우스를 보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타카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영화 속 그의 모습은 언제나 죽을힘을 다해 집으로만 달려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이렌의 노래를 들어보려 하고, 죽음 가까이 다가가는 선택을 반복한다.
물론 그가 일부러 귀환을 늦추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계속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트로이에서 그는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다.
자신의 병사들이 죽었고 적들이 죽었으며,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었다.
특히 영화에서 계속해서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나는 아테네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내게는 그 얼굴이 트로이에서 죽어간 여사제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나는 그것을 오디세우스가 떨치지 못하는 죄바카라감의 얼굴처럼 느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아직 전쟁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한 사람.
몸은 이타카를 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트로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오디세이』는 단순한 귀향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인간이 다시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했을 때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는 당연히 그가 페넬로페에게 곧장 달려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주변을 살핀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2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이타카는 변했고, 왕궁에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들어차 있다.
자신이 태어났고 왕으로 살았던 땅이라고 해서, 20년 뒤에도 자동으로 그곳이 자신의 집인 것은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도착했지만 아직 집에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다시 그곳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집은 한번 얻으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떠나 있는 동안 달라질 수도 있고, 내가 변하면서 더 이상 나와 맞지 않는 곳이 될 수도 있다.
오래 떠나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고향은 낯선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고향에서도 다시 집을 찾아야 한다.
영화에는 오디세우스와 대조되는 아가멤논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 역시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자신을 가장 반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이 없어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결국 집을 결정하는 것은 지붕도, 땅도, 주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익숙한 공간이라도 집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아주 낯선 곳에서도 내가 긴장을 풀 수 있다면 그곳은 잠시나마 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집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아마 페넬로페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이타카라는 섬보다 페넬로페가 있는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다만 사랑이 모든 것의 결론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 곁에서 집을 발견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굳이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는 오랫동안 들고 있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느 도시에서 살든, 어느 나라에 있든 그 사람의 옆자리는 집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아무리 넓고 좋은 집에 살더라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집이라는 단어를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집은 반드시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오래 살았던 곳도 아니고, 주민등록에 적힌 주소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도시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 자체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의 나인지 모른다.
어디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
어디에서 나는 긴장을 풀 수 있는가.
어디에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은가.
그곳이 잠시 머무는 호텔방이든, 오래된 고향집이든, 낯선 나라의 길 위든, 사랑하는 사람의 옆자리든 상관없다.
어쩌면 사람은 평생 하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맞는 집의 형태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오디세이』는 더 이상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을 떠돈 끝에 묻는 이야기다.
나는 어디에 있을 때 비로소 돌아왔다고 느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