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식자재
며칠 전 아침 식사 후, 설거지 끝날 무렵이었다. 식탁을 치우는 것을 도와주던 아내가 냉장고를 이것저것 뒤적이던 아내가 한마디 하였다.
“어허 이 사람이 냉장고에 무가 왜 여기저기 있어?”
우리 집 식자재 구입과 관리는 대체로 내가 맡고 있다.
냉장고에 뭐가 있고 뭐가 없는지 살피고, 내가 직접 사 오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가 밖에 있을 때는 아내에게 “올 때 이것 좀 사 와” 하고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늘 아내가 챙기는 것은, 과일들인데 그날은 아침 먹고 조금 쉬었다 큰공 집에 갈 계획이라 반찬이라도 해줄까 하고 냉장고 식자재 칸을 열어보며 한 말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붙인다.
“무가 제일 밑 칸에도 있고, 식자재 칸에도 있네, 냉장고 조사를 더 자주 해야겠군!”
“참 나! 당신이 챙기면 나야 더 좋지!”
“선입선출 몰라?”
컴퓨터 공부했고, 컴퓨터 제일 처음 배우는 개론 시간에 그것도 거의 첫머리에서 공부한 내용이다.
「First In, First Out」 이른바 FIFO 법칙이다.
오랜만에 들어본 선입선출先入先出이 냉장고 식자재 때문에 아내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내와 둘이 사는 집에서 대화는 늘 그렇다.
아내는 그냥 식자재 정리 이야기를 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젊을 때 컴퓨터 개론 시간에 배운 말이, 수십 년이 지나 우리 집 냉장고 앞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때는 자료 구조의 원리였고, 지금은 생활의 원리였다.
부부도 어쩌면 선입선출로 산다.
먼저 쌓인 서운함을 제때 꺼내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생긴 작은 말다툼까지 덧붙어 마음 안쪽에서 상한다. 반대로 먼저 고마웠던 기억을 자주 꺼내 쓰면, 오래된 마음도 싱싱하게 남는다. 냉장고 속 무를 제때 꺼내야 하듯, 마음속 말도 제때 꺼내야 한다.
그날
아내는 무를 정리했고, 나는 괜히 마음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