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by구기리

결혼식 전날 밤, 세진은 마지막으로 혼자 자는 자취방의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이 방의 불을 끄고 나가 승현과 함께 살 집으로 간다. 서른여섯, 이 방에서만 아홉 해를 살았다. 상자 열 개가 쌓여 있었고, 바카라상 서랍 하나만 아직 비우지 못한 채 열려 있었다.

그 서랍 맨 아래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서른한 살의 세진이 쓴 글씨였다. 연봉, 키, 직업의 안정성, 종교, 사는 곳, 부모님 직업, 술과 담배. 항목마다 동그라미와 별표가 붙어 있었고 맨 아래에는 굵은 글씨로 '이 중 세 개 이상 안 맞으면 시작하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진은 웃음이 났다. 승현은 이 목록에서 절반도 맞지 않았다. 키는 세진과 거의 비슷했고 직업은 안정적이라 하기엔 이직이 잦았으며 술은 세진보다 약했다. 그 종이대로라면 세진은 승현을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과 내일 결혼한다.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세진은 지금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 뛰었던 기억도 없었다. 다만 세 번째 만남에서 있었던 일은 선명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세진이 불쑥 말했다. "저, 사실 아직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좋아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이 말로 이 사람도 끝이겠구나 하고. 승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데 모르는 채로 다음에 또 봐도 되지 않을까요. 모르는 걸 같이 알아 가는 건 그럭저럭 괜찮은 시작 같은데."

세진은 그날 집에 돌아와 오래 앉아 있었다. 그동안의 만남에서는 한 번도 모른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모르는 마음을 아는 척 포장하거나, 모르는 채로 만나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숨겼다. 숨기는 동안 마음은 점점 애매해졌다. 그런데 모른다고 말하고 나자 모른다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 되었다. 승현과의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쌓였다. 확신이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함께 들고 걸어온 시간이었다.


그래도 불안은 있었다. 누군가는 이 불안을 설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세진에게는 그냥 불안이었다. 정말 이 사람이 맞을까, 목록에서 한참 벗어난 사람을 고른 내 선택은 옳을까, 서른 중반에 서둘러 고른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고, 세진은 문득 지난주의 일을 떠올렸다.

지난주, 마지막 청첩장을 건넨 사람은 대학 동기 지은이었다. 카페에서 봉투를 받아 든 지은은 한참 열지 못했다. "축하해." 지은이 웃었다. 그 웃음의 결을 세진은 알아보았다.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지었던,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어딘가를 떠도는 웃음이었다. 세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는 오히려 무례할 것 같았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잠깐 잡았다. 지은은 놀란 듯 세진을 보다가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웃었다. 와 줄 거지, 하고 세진이 묻자 지은이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아주 작은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때 세진은 알았다. 도착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아직 걷고 있다는 사실을 지워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확신 없음과 지은의 웃음이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세진은 서랍을 비웠다. 체크리스트는 버릴까 하다가 바카라 사이에 끼워 두었다. 이 종이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세진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알려 주는 종이였을 뿐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승현이었다.

"안 자요?"

"응. 짐 정리하다가."

"나도 잠이 안 와서요."

잠깐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저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세진이 웃었다.

"나도."

"그래도 내일 가요."

"응. 내일 가자."

전화를 끊고 창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먼 곳에서 첫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이 도시 어딘가에는 지금도 소개팅 문자를 들여다보는 사람, 거울 앞에서 자기 값을 묻는 사람, 시작도 못 한 채 이유를 세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었다. 세진은 그들 모두와 같은 길 위에서, 방금 어느 한 지점에 닿았을 뿐이었다.

세진은 창문을 닫고 불을 껐다. 확신은 끝내 오지 않았지만, 내일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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