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순례자

산티아고 순례길 : 2일 차,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byDK

3만 보만 걸으면 되는 만만한 하루

21km라는 다소 짧은 거리를 걷는 둘째 날.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 수비리에 닿는 여정이다. 길은 줄곧 내리막이다. 조식은 숙소 건물이 아닌 별도의 식당 건물에서 제공 중이었다. 침낭까지 포함해서 온 짐을 부렸다가 다시 싸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시간을 지체했다. 남들보다 늦게 식당으로 이동했고, 몇 남지 않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빵과 잼, 치즈를 먹었다. 짧은 구간이었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한 면도 있었고, 전날 피레네 산맥에서의 다리 찢기를 버텨낸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알베르게를 벗어날 때,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이었다.


줄곧 내리막인 오늘의 구간. 마지막 내리막에서는 바위들이 날카로웠다.


오전 8시쯤 알베르게 단지를 벗어났다. 8시는 대부분의 알베르게의 체크아웃 시간이다. 보통 그 시간까지 남아 있던 순례객을 기억해 보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금세 앞사람들을 추월하는 젊은이들이거나,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서 구간을 짧게 나누어 걷는 사람들, 또는 부상이나 체력 저하로 하루를 더 묵어 가거나, 아예 그날부로 순례를 포기하게 된 이들이었다.


줄지어 수비리로 향하는 사람들.
부슬비가 내려서 우비를 썼다 벗었다 해야 했다. 농장지대와 숲길은 진흙인데다 물웅덩이가 많아 트레킹화가 필수.


저속도로 휴게소

하루에 여섯 끼를 먹는 나날

부슬비가 오다 말다 해서 우리도 덩달아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 했다.

처음엔 숲길을 걸었고 마을을 하나 지났고, 농장 사이의 길을 지나 다시 마을에 닿았다. 두 번째 마을엔 길목에 음식점이 있어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들러서 아침 또는 아침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음식점이 있으면 그곳이 곧 '저속도로 휴게소'가 된다. 이 저속여정에서는 모두들 연비가 급격히 낮아지고, 늘 배고픈 상태가 된다. 우리 부부의 경우 두 시간에 한 번씩 뭔가를 먹어댔다. 아침, 간식, 간식, 점심, 간식, 저녁 정도가 루틴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도장은 매번 찍어야지' 하는 강박으로 칸 수 배분을 생각하지 않은 채 음식점마다 비치된 도장으로 칸을 채웠다.


커피, 오렌지주스, 샌드위치, 계란오믈렛, 피자...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둔다.


피자라는 사치

순례길을 걸으면서 피자라든지,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다시 보게 됐다. 왜 저 음식들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양파나 양상추, 심지어 버섯, 게다가 소스! 이런 것들이 곁들여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걸으면서 수시로 먹은 음식이 보카디요Bocadillo라는 스페인식 샌드위치인데, 갖가지 채소와 소스가 곁들여진 샌드위치와는 달랐다. 그냥 바게트를 갈라 하몽 또는 치즈와 하몽을 끼우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순례길이라서 음식이 간소화된 측면이 있겠지만, 채소와 소스, 물기나 따뜻함이 부족하다 보니 늘 먹다 만 느낌이었다. 따뜻한 계란 프라이 한 장을 빵에 얹어 먹는 것도 감지덕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느낀 건데, 피자는 매우 고급진 음식이었다.
그날 오전에 받았던 도장들. 오른쪽은 푸드트럭. 음식점이 있을 때가 됐는데 싶으면 하다못해 푸드트럭이라도 있다.


알베르게가 모두 만실이었다

피곤해진 관절로 막판의 돌길 내리막을 내려왔는데, 더 험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립 사립 할 것 없이 알베르게가 모두 만실이었던 것이다. 가성비 괜찮다 싶은 알베르게를 찾아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침대 없다'며 공공 알베르게를 소개.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알아들은 척하면서 가본 공립 알베르게도 이미 만실. 더 이상 가성비를 논하기엔 늦은 시간이라 여긴 너무 비싸다 싶어 지나쳤던 곳들로 돌아가면 거기도 그 사이 만실. 수비리 전체가 우리를 버린 것 같았다.


수비리 입구의 안내판. 길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왼쪽이 널찍한 마당을 가진 공립 알베르게. 일찍 가지 않으면 침대 얻기가 쉽지 않다.

"호텔 알아보면 되지 뭐."

돈을 쓰면 되겠지, 싶어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호텔앱은 평소 사용하던 게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미리 알아보고, 돌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즉시 대답할 준비가 된, '오빠 페르소나'는 살아 있었다.

많이들 그렇게 한대. 숙소 없으면 앞마을이나 뒷마을 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차 타고 와서 그 지점부터 걸으면 된대.


흔들리는 오빠

허나... 수비리에서는 호텔이 찾아지지 않았다.

겨우 찾은 건 근처 마을이나 근처 산골의 호텔이었다. 택시를 타고 20분 이상 가야 했다. 그런데 택시를 부르려면 스페인 현지에서 쓸 수 있는 앱을 깔아야 했다. 앱을 깔려면 각종 인증을 해야 했다. 짜증이 났다. 짜증은 오빠를 오빠답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해가 눕고 있었다. 근처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여유를 부리며 어슬렁거리거나 일광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양의 나라를 걷느라 피곤해진 얼굴이 더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끝에서, 이제는 스멀스멀 한국어 육두문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쯤. 아내가 혹시나 싶어 해 본 에어비앤비 하나가 잡혔다.


요행히 에어비앤비를 얻었다. 둘째날부터 호사스럽게 더블베드.


화풀이, 혹은 용서는 마트에서

마트를 터는 즐거움

화풀이는 역시 마트에서 해야 제맛이다.

하루 종일 걷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걷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잘 먹으면서 왔지만, 숙소 구하느라 더해진 피로감이 다시 허기를 불렀다. 수비리가 꽤 작은 마을임에도, 동양식품까지 어느 정도 갖춘 가게가 있었다. 거기에서 와인과 컵라면, 요구르트, 스파게티, 피클, 하몽, 하리보 등등을 사 왔고 바게트, 사과 등 '론세스바예스 도시락'에서 남은 것과 한국에서 공수해 간 라면까지 더해 다음날 아침까지 해 먹고 출발했다. 1박 하는 내내 침대가 아니라 거의 부엌에서 보낸 느낌이다.


마트에서 털어 온 식재료들.
수비리에서의 저녁식사.
수비리 떠나는 날의 아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그날의 사진과 영상을 뒤져 보면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먹기 이전의 감정과 기억'처럼 수비리를 다소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위기에 처한 순간과 숙소를 찾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던 사건에 집중하다 보니,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특이하지는 않았지만 산티아고 길이 그렇듯 아름다운 길과 운치 있는 마을들, 질리지 않는 소박한 음식들과 따사로운 4월 말의 햇살.. 그런 것들이 없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보니,

기억되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거쳐서 우리가 그곳에 간 것이었다.

2025년 4월 24일이었다.



Santiago Tip

나이 드신 분들이 절망에 빠질 때가 바로 숙소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때다.

공립 알베르게 다인실(베드)은 대부분 예약을 받지 않으니

돈을 조금 더 써서 1~2인실이나, 사설 알베르게를 예약하고 움직이시길 권한다.

가서 잘 곳이 준비돼 있다면 걷는 페이스도 내 몸에 맞춰 느긋하게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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