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5화
“젠장… 지각이잖아.”
세호는 신물처럼 올라오는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릿속은 아직도 어젯밤 사이트릭스 오아시스에서 보았던 그 보랏빛 조명과, 자신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에이스 풀하우스의 잔상으로 어지러웠다. 차가운 물을 대야 가득 받아 얼굴에 세 번 연달아 끼얹었다. 피부를 찌르는 물리적인 통증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했지만, 거울 속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 눈동자에는 카지노의 네온빛이 잔향처럼 고여 있었고, 안색은 현실의 태양광보다는 가상의 인공조명에 더 익숙해진 사람처럼 창백했다.
면도기는 턱을 긁으며 둔탁하고 거친 소리를 냈다. 그는 채 마르지 않은 셔츠를 대충 걸친 뒤, 매듭도 제대로 매지 않은 채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출근길 지하철 안은 거대한 통조림 캔 같았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피곤이 눅눅하게 눌러붙은 어깨, 스마트폰 화면 위를 기계적으로 오가는 손가락들. 세호는 그 군중 틈에 끼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는 여전히 사이트릭스의 안내음과 슬롯머신의 회전음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현실의 소음과 가상의 잔향이 뒤섞여 세계의 해상도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 건물에 도착해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얼음송곳 같은 날카로운 시선들이 일제히 날아와 그의 가슴에 박혔다.
“미스터 한, 오늘 회의 자료는 어디 있지? 우리가 자네의 개인 비서는 아니지 않나.”
팀장이자 프로젝트 매니저인 존 밀러였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안경 너머로 세호의 얼굴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동료 사이토가 곤란하다는 듯 눈길을 피해 서류를 넘겼다. 인도 출신의 실력파 엔지니어 아니타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정지된 액체처럼 무거웠고, 세호는 그 속에 갇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바로 정리해서 공유하겠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약간 있어서…”
“시스템 오류인지 자네 정신 상태의 오류인지 확실히 해두게.”
존의 입가가 얇고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세호의 변명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런 식의 막판 수정과 지연은 곤란해. 자네 한 명의 태만이 팀 전체 일정, 나아가 고객사와의 신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 여긴 놀이터가 아니야.”
프로젝터의 푸른 빛이 사람들의 얼굴 위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독일 출신의 데이터 분석가 마티아스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세호를 노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의미심장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세호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손은 떨리고 있었고, 노트북 화면 속의 코드는 외계어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엎어둔 세호의 스마트폰이 짧고 묵직한 진동을 내뱉었다.
윙—.
그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켰다. 회의 중이라는 사실도, 존 밀러의 경고도 잊은 채였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에 의한 반응이었다.
[사이트릭스 뱅크] 상환 요청 및 계정 동결 예고 알림 고객 계정: CXR-0093-84A1-55K8-773C 내용: 긴급 상환 기일 안내 및 미납 자산에 대한 담보권 실행 절차 착수...
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다. 아니, 스팸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현실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한, 지금 뭐 하는 건가?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나?”
존 밀러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공기를 갈랐다. 세호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황급히 폰을 뒤집어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았다. 동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에게 쏠렸다. 아니타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마티아스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가족 연락인 줄 알고… 다시 집중하겠습니다.” “미스터 한, 자네의 ‘집중’은 이미 퇴근한 것 같군. 회의 끝나고 잠시 남게.”
회의가 끝난 뒤, 세호는 도망치듯 휴게실로 향했다. 자동 머신은 우웅— 하는 불쾌한 기계음을 내며 뜨겁고 쓴 갈색 액체를 종이컵 속으로 뱉어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사이토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엔 걱정과 경고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세호, 전에 사이트릭스에 들어간다고 자랑했던 것 같은데, 요즘 너무 깊이 빠져있는거 아니야? 안색이 정말 말이 아니야. 눈동자가 초점이 없어.” “아… 뭐, 그냥 좀 구경하느라요.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솔직히 나도 들어가고 싶지. 근데 이제는 힘들겠더라고. 환율이 장난 아니잖아. 캐시 값이 너무 올라서, 나 같은 월급쟁이는 입구 근처에도 못 가요. 그건 이제 부자들의 전유물이거나, 인생을 건 도박꾼들의 성지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니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끼어들었다.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는 실시간 환율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1캐시당 600원대였는데, 오늘 아침 보니까 800원을 돌파했더라고요. 이건 경제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폭등이에요. 사람들이 현실 자산을 다 팔아서 사이트릭스로 올인하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인가 봐요. 현실의 원화나 달러는 이제 휴짓조각이 되어가고 있어요.”
사이토가 코웃음을 쳤다.
“거기서 빚진 사람들은 이제 끝장이겠지. 환율이 오를수록 그들이 갚아야 할 현실의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인생이 순식간에 휘발되는 걸 지켜봐야 할걸? 말 그대로 영혼을 저당 잡힌 셈이지.”
세호는 커피 컵을 들고 있다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액체가 출렁이며 손등에 튀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까 본 문자를 다시 열었다. 손가락이 떨려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렸다.
상환 금액: 375,000 CRX Cash 상환 마감: BLOCK-#98837721/HASHLOCK{7f2a-9c7d-88b1-45de}
머릿속에서 개발자 특유의 빠른 계산이 시작되었다. 375,000에 현재 환율 800원을 곱하면…. 3억. 정확히 3억 원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2억 초반이었던 빚이 자고 일어나니 1억이 불어나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휴게실의 소음은 수만 미터 밖에서 들리는 잡음처럼 멀어졌고, 갓 뽑은 커피 향은 구역질 나는 기계 냄새로 변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컵을 들고 있었지만, 그 안의 액체는 이미 세호의 심장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화장실 타일의 무늬가 일렁이며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날 밤, 세호는 집 현관문을 닫고 거실 조명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손에 쥔 스마트폰 속의 상환 알림 숫자가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그를 비웃었다. 그 코드와 숫자들은 거대한 사슬이 되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TV를 켜자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앵커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내용은 잔혹했다.
“전문가들은 CRX 캐시의 가치가 연말까지 현재의 2배 이상 상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가상 세계로의 인구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현실 화폐의 가치는 하락하고 가상 화폐가 실질적인 기축 통화가 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에 따라 기존 채무자들의 상환 부담은 파산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사이트릭스 코퍼레이션은 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가상 자산 압류 및 현실 자산 추심 강도를 높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두 배… 내 빚이… 6억이 된다고? 내가 평생 벌어도 못 갚는 돈인데?”
세호의 목소리가 텅 빈 거실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벽과 천장이, 심지어 손때 묻은 가구들조차 숨 쉬는 틈 없이 그를 압박하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성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이거 환율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야? 연락 좀 줘. 제발.]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것은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서 친구라는 믿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완벽한 고립. 성준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 역시 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것일까? 그는 절망 속에서 낮게 읊조렸다.
“이대로라면… 이 빚은 죽음 전엔 끝나지 않아. 아니, 죽어도 끝나지 않을지 몰라.”
현실에서 일해서는 800원대의 환율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현실의 노동은 너무나 느리고 가치는 낮았다. 유일한 방법은 사이트릭스 안에서 더 높은 부가가치의 노동을 하거나, 더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뿐이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해 밤을 없앴다면, 사이트릭스는 이제 인간의 꿈과 휴식마저 노동의 시간으로 편입시키고 있었다.
“웰컴 투, 사이트릭스.”
다시 접속한 그곳은 어제의 오아시스가 아니었다. 세호의 시야에 펼쳐진 것은 화려한 카지노가 아니라, 끝없이 늘어선 차가운 빌딩 숲이었다. 네온사인 뒤편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공중에 매달린 판타지아 구역의 화려한 성채는 이제 손에 닿지 않는 거대한 미끼처럼 보였다.
그 아래 비즈니스 구역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정장, 유니폼, 각자의 직업을 상징하는 의상을 입은 아바타들. 하지만 그들의 걸음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것은 활기찬 출근길이 아니라,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제자리로 찾아가는 공정 라인 같았다.
그들의 눈빛은 멍했고, 표정은 박제된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들은 피곤함을 느끼는 단계조차 지나버린, 저항의 의지가 거세된 데이터 덩어리들이었다. 현실에서는 잠을 자고 있겠지만, 그들의 뇌는 사이트릭스의 서버에 연결되어 쉴 새 없이 숫자를 계산하고 코드를 짜고 있었다.
서로 어깨가 부딪혀도 사과하는 이가 없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이미 소거되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오직 ‘생산력’과 ‘캐시’라는 화폐 가치뿐이었다. 세호는 그 행렬 속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서버의 부하를 줄이기 위한 최적화된 연산 단위인가.
“이건 출근이 아니야. 이건 영혼들의 장례 행렬이지. 빚을 갚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는 컨베이어 벨트야.”
사람들의 발걸음은 기괴할 정도로 일치했다. 구두 굽 소리가 거대한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웅웅거렸다. 네온 불빛이 비추는 바닥에는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하나같이 겹쳐지고 흩어지며, 결국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어둠 덩어리로 합쳐졌다.
그때였다. 사거리 건너편에서 흐름에 역행하는 한 여자가 보였다. 수천 명의 질서 정연한 대열 속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지독한 노이즈였다. 그녀의 걸음은 불규칙했고, 머리카락은 가상의 바람에 거칠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기묘했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경련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슬픔과 희열이 한 얼굴에서 충돌하며 일그러진 괴이한 표정.
그녀는 공중에 대고 무언가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자신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보이지 않는 허공과 대화하며 자신의 실존을 붙잡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혹은, 이미 현실을 잊어버리고 이 가상 세계의 논리에 완전히 잠식당한 자의 말로일지도 몰랐다.
세호는 찰나의 순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공허함과, 마지막 남은 무언가에 집착하는 광기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미래에서 미리 만난 것 같은 섬뜩함이었다. 그녀의 입술 모양을 보아하니, 그녀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 아기… 내 아기…”
그것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고장 난 기계의 오작동 소리처럼 들렸다. 세호는 외면하듯 고개를 숙였다.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파도는 다시 건물을 향해 흘러갔다. 세호 역시 그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 빌딩 숲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울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기괴한 얼굴로,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며 홀로 부서져 가고 있었다.
도시의 네온사인은 여전히 눈부셨지만, 그 아래에서 세호는 자신이 이미 거대한 무덤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었다. 환율이라는 이름의 신이 다스리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