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4화

by아이작 유

깜깜한 병원의 복도는 깊은 수렁과 같았다. 새벽 3시의 공기는 병원 특유의 싸늘한 소독약 냄새와 죽음이 머물다 간 자리의 서늘함에 젖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네온사인 하나가 불규칙하게 명멸하며 바닥 위에 창백한 빛의 줄기를 던졌고, 그 빛은 도망치듯 걷는 마리의 발끝을 신경질적으로 스쳤다.


고무창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마치 귀에 두꺼운 솜을 박아둔 듯 먹먹하게 묻혀버렸지만, 그 지독한 무음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내뱉는 둔탁한 울림을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쿵, 쿵, 쿵.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기보다, 붕괴하기 직전의 건축물이 내는 비명에 가까웠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익숙한 복도가 오늘은 낯설게 뒤틀려 있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자판기의 하얀 형광등 불빛은 취조실의 조명처럼 차가웠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들리는 ‘슈우-’ 하는 기계적 숨소리는 누군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 복도 끝에 놓인 휠체어의 그림자는 괴이하게 길어져 마치 거대한 거미가 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사물들이 일제히 감시자의 눈으로 돌변해 그녀의 죄바카라감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야. 이건 정말로 미친 짓이야.’


마리는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죄바카라감이라는 감정은 이미 생존을 향한 절박함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남편의 배신, 병원의 누명, 그리고 뱃속에서 사라진 아이의 잔상. 현실이라는 냉혹한 경계선에서 그녀가 향하는 목표는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넥서스 A-Prime(Nexus A-Prime).


병원 중환자실이나 특수 병동에서 일하며 수없이 그 이름을 들었다. 그것은 사이트릭스 코퍼레이션이 개발한 최첨단 생체 유지 시스템이자, 일종의 ‘시간 응축기’였다. 현실의 1시간을 가상의 10개월로 치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같은 용액.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들에게는 천국의 열쇠였고, 윤리주의자들에게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독약이었다. 마리는 단 한 번도 그것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엄격하게 관리되는 관리자 외 출입 금지 구역, 이른바 ‘검은 캐비닛’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관리실 앞, 주머니 속에서 몰래 복제한 마스터키를 꺼냈다. 손바닥에 밴 식은땀 때문에 금속 열쇠가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열쇠를 낚아채는 순간, 심장이 고막을 안쪽에서 찢어버릴 듯 격렬하게 치받았다.


‘딱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나를 용서해줘.’


누구에게 빌고 있는지도 모를 기도를 올리며 마리는 문을 열었다. 안은 특수 보관실 특유의 진공 상태 같은 정적과 무취의 냉기가 가득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그 차가운 공기는 심장을 순식간에 얼려버릴 듯했다. 벽면 가득 은빛 케이스들이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었다.


그 케이스 라벨에 새겨진 ‘Nexus A-Prime’이라는 문구가 푸른 조명을 받아 생선의 비늘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빛났다. 마리는 숨을 죽이고 가장 안쪽에 있는 한 팩을 꺼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무게감이 실로 기묘했다. 이 안에 든 것이 단순히 화학적인 액체일지, 아니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농축된 시간의 파편일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팩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더 이상 ‘내일’이라는 태양은 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냉기가 팔목의 혈관을 타고 심장 근처까지 스며들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일정한 간격의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새벽 순찰을 도는 경비원이었다. 순간, 마리의 몸은 이성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약품 진열대 뒤 어둠 속으로 몸을 구겼다. 가슴에 넥서스 팩을 바짝 끌어안았다. 팩의 냉기가 얇은 환자복(혹은 간호복)을 뚫고 가슴팍에 달라붙어 심장 박동마저 멈춰버리게 할 것 같았다. 복도 너머에서 손전등의 날카로운 빛줄기가 문틈 사이를 긁으며 스쳐 지나갔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보관실 안으로 침투했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 꺽꺽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폐가 산소를 갈구하며 파도처럼 솟구쳤지만, 마리는 입을 틀어막고 눈을 부릅떴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그 빛이 진열대 뒤를 조금만 더 깊게 훑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도둑, 배신자, 낙오자. 온갖 수식어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환각이 보였다.


발자국 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1초가 1년처럼 길게 늘어지는 넥서스의 시간 속으로 미리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서서히,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육중한 방화문이 닫히는 ‘철컥’ 소리가 복도 끝에서 메아리쳤을 때야 마리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다리가 종잇장처럼 떨려와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팩을 가방 가장 깊숙한 곳, 낡은 다이어리 사이에 쑤셔 넣었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판돈으로 던진 거대한 도박판 위에 서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침대 밑에서 주사 라인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려 알코올 솜으로 팔안쪽을 닦아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바늘이 혈관을 뚫고 들어갔을 때, 넥서스 용액의 차갑고 묵직한 질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만성적인 허기와 갈증, 영혼까지 갉아먹던 극심한 피로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뇌의 뉴런들이 하나하나 깨어나 정밀하게 조율된 시계태엽처럼 매끄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신체는 가상 세계의 방대한 데이터를 받아들일 최적의 상태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마리는 떨리는 손으로 엔트리스(Entries) 기기를 이마에 착용했다. 관자놀이를 따라 미세한 전류가 스치며 뇌파를 동기화했다. 천천히 눈을 감자, 시야를 가득 메우던 낡은 자취방의 풍경이 하얀 노이즈 속으로 증발했다.

사방에서 완벽한 무음(無音)의 공간이 닫혀왔다. 그것은 포근하고 거대했으며, 현실의 그 어떤 소음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성역이었다. 마치 금기시된 천국의 뒷문을 몰래 열고 들어온 침입자가 느낄법한 숭고한 공포와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현실의 고통도, 남편의 차가운 눈빛도, 배 속의 상실감도 그 투명한 흰 빛 속에 녹아내려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귓가에서, 세계의 끝을 알리는 감미로운 기계음이 속삭였다.


“웰컴 투, 사이트릭스.”


마리는 아주 길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폐부 끝까지 들어찬 가상의 공기는 현실의 산소보다 훨씬 달콤했다. 그녀는 이제 결심했다. 더 이상 저 문 너머의 회색빛 현실을 떠올리지 않기로. 돌아갈 육체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기로. 그녀는 기꺼이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그것은 구원인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상관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만큼은,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바카라임을 추궁당하는 ‘익명의 간호사 A씨’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숨 쉬는, 경계 밖의 존재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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