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6화
오피스 구역의 빽빽한 빌딩 숲 속, 세호는 지정된 오피스에서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단조로운 노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창문은 존재하지 않았고, 천장에는 차가운 인공 조명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조차 무의미했다. 오직 모니터 하단에 떠 있는 디지털시계만이 흐르지 않는 시간을 억지로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대륙에서 건너왔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 모습만큼은 하나의 거대한 복사기처럼 보였다. 같은 각도로 굽은 등,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생기를 잃은 눈동자까지. 기계음이 잔잔하게 흐르는 적막 속에서, 누군가의 억눌린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섞여 들었다.
“이거, 끝나도 끝나는 게 아니군.”
옆자리의 남자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내뱉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다른 자리에서 참아왔던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대출 갚으면 좀 숨통이 트일 줄 알았지. 근데 이놈의 이자는 자고 일어나면 불어나 있어.”
한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환율이 뛰니까 해외에서 보낸 돈이 종잇조각이 됐어. 빚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어났다고.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세호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에서 나온 웃음이라기보다, 목구멍에 걸린 마른 헛기침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에 떠 있는 채무 상환 그래프를 훑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멀찍이 앉은, 프랑스에서 왔다는 동료가 어깨를 으쓱하며 낮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긴 감옥보다 나빠. 최소한 감옥은 밥은 거저 주거든. 여긴 숨 쉬는 것조차 비용이야. 밥값에, 의복 대여에, 심지어 이 좁아터진 자리세까지 우리가 내야 하잖아. 일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마법 같은 곳이지.”
그의 말끝이 사라지자 다시 단조로운 키보드 소리와 차가운 기계음이 공간을 메웠다. 동료들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 잠깐의 파동을 남기고는, 거대한 소음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구 하나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않았다. 서로의 불행을 확인할 여유조차 사치였기 때문이다.
세호는 다시 화면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데이터와 복잡한 숫자들. 아무리 코드를 입력하고 명령어를 처리해도, 어깨를 짓누르는 채무의 무게는 전혀 가벼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노예란 게 딱 이런 거겠지… 쇠사슬만 안 보일 뿐이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렸다. 목뼈가 맞물리는 불쾌한 소리가 났지만, 그는 다시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았고, 그들의 노동 또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퇴근을 알리는 기계적인 알람 소리가 오피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세호는 마침내 그 무거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빌딩 사이로 가득 찬 습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머릿속은 마치 회색 안개가 낀 듯 먹먹했고, 가슴 한복판은 단단한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담배 갑을 꺼냈다. 라이터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잠깐 일렁이다 사라졌고, 이내 첫 모금을 깊게 들이켰다. 뜨거운 연기가 거친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가, 폐 안쪽에서 소용돌이치며 천천히 빠져나왔다. 입안을 가득 메운 독한 연기는 밤하늘의 낮은 구름에 달라붙듯 뭉게뭉게 흩어졌다.
“가짜 치고는… 맛이 너무 선명하잖아. 기분 나쁘게.”
그는 허공에 대고 푸념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릴 만큼 공허했다. 바로 그때였다. 평소에는 인적조차 드물던 건너편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퍽, 퍽’ 하는 기분 나쁘고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세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겨우 닿는 그곳에는 칠이 벗겨진 낡은 차 한 대가 비스듬히 서 있었고, 험악한 인상의 불량배 무리가 한 남자를 사냥감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바닥에 진흙처럼 엎드린 남자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세호의 귀에 박혔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요…”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 짐승의 신음 같았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기괴하게 일렁였고, 얼굴 절반은 검은색 목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드러난 눈매와 이마의 선이 찰나의 순간 세호의 기억을 건드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혼탁해진 정신으로는 끝내 그 정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여긴 구걸이 통하는 곳이 아냐. 네 주제에 자비까지 바라는 건 반칙이지.”
대장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매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짓는 듯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대신, 네가 우리 편이 되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땐 이걸 줄 수도 있어.”
대장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에는 은밀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작은 병들이 들려 있었다. 병 안의 미세한 입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결같이 일렁였고, 보는 이의 넋을 통째로 빼앗을 듯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그는 바닥을 기어 대장의 발치로 다가가더니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미친 듯이 벌렸다.
마치 신을 영접한 광신도나, 금단현상에 몸부림치는 중독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자의 입술은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처럼 헐떡였고,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광기에 잠식되었다.
“오… 제발, 그거 하나면 됩니다. 그거 하나면 살 수 있어요…!”
남자의 울부짖음은 기괴한 찬송가처럼 골목을 울렸고, 그의 몸짓은 환영의 의식을 치르는 주술사처럼 보였다. 뒤에 서 있던 불량배들이 역겹다는 듯 비웃음을 터뜨렸지만, 대장은 미묘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남자의 더러워진 손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단숨에 그를 짐짝처럼 낡은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긴박감이 흘렀다. 세호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공포는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골목 안쪽 어둠 속에서 대장의 서늘한 시선이 이미 세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거기, 너. 방금 뭘 본 거지?”
낮게 깔리는 그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드는 순간, 세호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대장의 손짓 한 번에 불량배 서너 명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묵직한 주먹이 명치를 깊숙이 파고들자 폐 속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세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손에서 떨어진 담배는 아스팔트 위에서 쓸쓸한 불꽃을 튀기며 사그라들었다.
“아… 그냥, 지나가던 길… 이었…”
변명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단단한 군화발이 세호의 관자놀이를 가차 없이 후려쳤다. 시야가 하얗게 폭발하며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이명이 꽉 찼고, 비틀거리는 의식 사이로 거친 손들이 그의 두 팔을 낚아챘다. 마치 거대한 철제 집게에 고정된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때, 조롱하듯 무리의 틈을 가르며 대장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도 기이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이 세호의 눈을 응시했다. 대장의 오른손에 들린 은빛 금속이 차가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순간, 날카로운 금속이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가더니 이내 살을 파고들어 뼈마디까지 닿는 감각이 전해졌다. 번개에 맞은 듯한 예리한 통증이 신경계를 타고 몸 전체를 난도질했다. 세호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뜨겁고 진한 피가 옆구리를 타고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처박힌 채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불량배들은 마치 쓰레기를 치운 듯 아무런 미련 없이 낡은 차에 올라탔고, 매연을 내뿜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호의 시야는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가며 흔적도 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현실도 아닌 이곳에서, 허무하게.’
몸의 감각이 서서히 멀어지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했고, 삶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절망의 끝자락이었다.
멀리서 구두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오더니, 누군가 세호의 상체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숨을 가쁘게 헐떡이며 그를 부축하는 손길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움직이지 마요! 정신 차려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주변의 모든 소음을 압도할 만큼 단호했다. 어둠에 적응된 세호의 눈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들어왔다. 마리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방금까지 울었던 듯 붉게 충전된 눈가. 하지만 그녀의 손놀림은 공포에 질린 표정과는 반대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숙련되어 있었다.
마리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옷자락을 손발로 잡아당겨 북 찢어냈다. 그리고는 거친 천 조각을 뭉쳐 세호의 옆구리에 박힌 상처를 강하게 압박했다. 피가 끊임없이 배어 나와 그녀의 하얀 손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호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운이 좋았어요. 주요 장기는 비껴간 것 같아요. 하지만 출혈이 심해요. 제발, 제 말 들으세요. 움직이지 말고 숨 크게 쉬어요.”
세호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눈앞의 여자를 이해해보려 애썼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광기에 찬 환상처럼 보였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옆구리를 짓누르는 그녀의 손길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안정감과 보호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와 달리, 그녀의 지저분한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기이할 정도로 따뜻했다.
‘이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왜 나를…?’
질문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세호의 마지막 남은 희미한 의식은 거대한 심해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마리의 절실한 눈동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