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03

by아이작 유

“산모님, 정신 차리세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목소리는 분명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 소리를 수심 수십 미터 아래 고인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고 아득하게 느꼈다. 마치 세상과 자신 사이에 두꺼운 고무 막이 겹겹이 쳐진 기분이었다. 물속에 얼굴을 담근 사람처럼, 고막을 통과하는 모든 음절은 기묘하게 굴절되고 일그러졌다. 빛도,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심지어 살갗에 닿는 온기마저도 농도가 옅어지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팔다리의 감각은 이미 자신의 소유가 아닌 듯 낯설게 변했고, 눈꺼풀 아래에서는 타르처럼 검은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일렁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건지, 바닥이 이마를 향해 솟구치는 건지 알 수 없는 전도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의식의 파편을 붙잡았다.


‘아기가… 우리 아기가…….’


그 간절한 문장만을 남긴 채, 그녀의 의식은 끊어진 필름처럼 암전되었다. 그녀는 마치 정교하게 접어놓은 종이 인형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닥을 향해 꺾여 내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 대기실은 면회객들과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바쁘게 움직였고,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누군가의 탄식이 교차하며 소음의 층위를 쌓았다. 하지만 마리가 머무는 반경 1미터 안은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이동식 침대에 몸을 뉘인 채, 아무런 감흥 없이 하얀 천장과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형광등의 파동을 멍하니 응시했다.


무언가 빠져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떨져 나간 통증과는 결이 달랐다. 영혼의 가장 깊숙한 핵심, 존재를 지탱하던 기둥 하나가 통째로 뽑혀 나간 듯한 허무였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어떤 무게였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기억의 입구마다 자물쇠가 채워졌고, 그녀는 기꺼이 그 열쇠를 깊은 늪에 던져버렸다. 남편이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리야… 정신이 들어? 나야, 내가 왔어.”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분명 진실한 슬픔의 증거였다. 하지만 마리는 그에게 잡힌 자신의 손이 타인의 것처럼 이질적이라고 느꼈다. 그 따뜻한 체온이 왜 이렇게 차갑고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아마도 이미 건너버린 강 너머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늦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었고, 그녀의 내부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와 같았다.


담당 의사는 서류철을 끼고 들어와 사무적이고 차분한 톤으로 선고를 내렸다.


“유산입니다. 안타깝지만, 산모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후 한동안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했다. 시간은 창밖으로 계절의 색을 바꾸며 조용히 흘러갔지만, 그녀의 시계는 그날의 수술대 위에 멈춰 있었다. 머리맡에는 항상 고인 물처럼 같은 꿈이 차올랐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깝고도 그리운 소리. 하지만 번쩍 눈을 떠 보면 방 안을 채우는 건 지독한 정적과 먼지 쌓인 가구들의 실루엣뿐이었다.


냉장고 안의 식재료들은 검게 변하며 썩어갔고, 세탁기 속의 젖은 빨래들은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며칠째 방치되었다. TV는 단 한 번도 켜지지 않았고, 거실의 벽시계는 건전지가 다했는지 오후 3시 15분에 멈춘 채 요지부동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녀만이 멈춰버린 시간의 틈새에 박제된 채 남겨진 기분이었다.


남편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슬픔도 유통기한이 있는 법이었다.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하며 넥타이를 매는 그의 뒷모습에선 피로와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는 똑같은 문장들을 기계처럼 반복하기 시작했다.


“마리야,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도 힘들어. 나라고 괜찮은 줄 알아?”

“이런 식은 우리 둘 다에게 독이야. 제발 정신 좀 차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짐승 같은 목소리로 뱉어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 네 눈을 보는 게 고문이야.”


그 선언을 마지막으로 그는 집을 나갔다. 목적지에 대한 말도, 언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가 떠난 텅 빈 방 안에는 그의 스킨 냄새와 눅눅한 체취가 오래도록 부유했다. 마리는 그 체취가 밴 베개를 꼭 껴안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불을 끄지 않은 채, 하지만 이미 마음속의 불은 꺼져버린 사람처럼 영혼 없는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그 후, 마리는 도망치듯 원래 근무하던 병원으로 복직했다. 상담 의사는 “일상의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는 데 통계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건넸다. 그 말이 진심 어린 위로인지, 아니면 의학 서적의 구절을 인용한 무미건조한 처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로운 건축물 같았기에,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출근 첫날, 푸른색 출입증을 목에 걸며 병동으로 들어서던 순간,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잊자. 기계처럼 움직이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하자.’


그러나 그 얄팍한 결심은 병동 복도를 가득 채운 생동감 넘치는 울음소리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는 산모들의 얼굴, 분만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손을 맞잡고 기도하던 남편들의 실루엣. 그 모든 풍경이 마치 덜 아문 상처를 날카로운 메스로 다시 긋는 듯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한때는 생명의 신비가 가득한 축복의 공간이었던 그곳이, 이제는 냉동고 속의 차가운 유리병처럼 소름 끼치도록 시린 장소가 되어 있었다.


비극은 가장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밤 근무 중이었다. 응급 산모가 출혈이 심한 상태로 실려 왔고, 당직 의사는 하필이면 긴급 회의 중이라며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리는 매뉴얼을 머릿속에 통째로 띄운 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떨리는 손끝을 애써 진정시키며, 메마른 입술로 의료 기구들을 준비했다. 그녀는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과 경험을 쏟아부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생명의 불꽃은 인간의 의지보다 연약했다. 새벽 2시 47분, 산모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분만실을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마리는 병원장실로 불려갔다. 팀장은 차마 마리의 눈을 보지 못한 채 창밖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입장이 난처해, 이마리 씨. 보호자 측이 벌써 언론에 제보를 했고, 인터넷에는 벌써 괴담이 돌고 있어. 병원의 대외적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


긴 변명 뒤에 숨겨진 본질은 선명했다. 누군가 비난의 화살을 대신 맞아줄 과녁이 필요했고, 마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던 ‘유산 경력이 있는 간호사’는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며칠 후,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도배했다.


[단독] ‘익명의 간호사 A씨, 대응 미숙으로 산모 사망… 병원 측 중징계 검토 중’


마리는 커튼을 굳게 닫은 방 안에서 그 기사를 수백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었다. 그 안에 등장하는 무미건조한 알파벳 ‘A’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녀만은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사건의 팩트는 곡해되었고, 앞뒤 맥락은 편의에 따라 누락되었으며, 진실 따위는 대중의 가십 거리 앞에선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저 ‘바카라임질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고, 세상은 마리를 그 자리에 세웠다.


마리는 집안의 모든 빛을 차단했다. 처음에는 햇빛이 너무 눈부셔 눈이 아파서였고, 나중에는 창밖의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환각 때문이었으며, 결국에는 바깥세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자체가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천장의 얼룩을 세었다. 냉장고는 이제 텅 빈 동굴처럼 변했고, 밥솥 안의 밥은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루에 딱 한 번, 커피 한 잔을 타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생산적 활동이었다. 컵 안의 커피는 항상 반쯤 마신 채 식어 있었고, 씻지 않은 컵들이 테이블 위에 군락을 이루었다. 먼지가 쌓이고 가끔 작은 벌레들이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쫓을 기력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였다.


가끔, 집 안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명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나가면 소리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고장 난 전기 신호인지, 아니면 떠나지 못한 기억의 잔상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벽지에 밴 무늬를 응시하며 해가 뜨고 지는 궤적을 몸으로만 느꼈다.

어느 비 오는 저녁, 테이블 위에 버려져 있던 스마트폰 화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산하며 깜빡였다. 그녀는 마치 홀린 듯 손을 뻗어 알림을 열었다. 대학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던 친구 은지의 메시지였다.


“마리야,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미안한데… 고민하다가 보내.

나 오늘 시내에서 네 남편 봤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더라고. 웬 젊은 여자랑 같이 쇼핑하고 있더라. 그냥 아는 사이 수준이 아니었어. 너한테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얼음 결정이 얼어붙는 듯한 서늘함이 몰려왔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았고, 눈물이 터지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깊고 차가운 심해에 온몸을 담근 것 같은 무감각한 감각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슬픔보다 무서운 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허무였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생기를 잃은 눈동자와 뼈만 남은 창백한 얼굴을 한 유령 같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안에는 사랑받았던 기억도, 아이를 기다렸던 설레임도, 억울한 누명에 대한 분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껍질만이 존재했다.


‘나는 여기서 사라져야 해. 반드시… 이 세계에서 벗어나야 해.’


그 생각은 전율처럼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이곳은 이제 그녀에게 고통의 집적체일 뿐이었다. 배신과 상실, 오해와 고독으로 점철된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먼지 쌓인 여행 가방을 꺼냈다. 짐을 챙기는 손동작은 서툴렀지만, 그 행위 자체가 주는 기묘한 해방감이 그녀를 지탱했다.


현관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서자, 날카로운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의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며, 마리는 수개월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것은 살기 위한 박동이라기보다는, 죽어가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최후의 동력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공기를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만이 그녀를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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