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기세다. 기세로 밀어부쳐!

???: 기세가 뭐죠?

by캐롤

최근 2년 사이에 전국구 메인스트림에 등극하신 정일영 교수님을 좋아한다. 방송에서 폭주하는 모습과 여러 사이다 발언들이 어딘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재미있는 강의로 인하대에서 유명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이 분 그런데 자칭 '극내성인'이시다. 중앙일보 기자가 인터뷰를 청했는데,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것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통화를 30분 동안 했는데도 인터뷰 약속을 못 잡았다나. “저는 뭐 다 괜찮습니다” “제가 맞추면 됩니다”“아, 그러시구나. 죄송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만 30분이 지나갔다고 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01281


극내향인


나는 극내향인이다. 극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내가 내향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도 잘 걸고, 질문도 잘할 뿐만 아니라 스몰토크를 리드할 수도 있다. 택시를 타면 먼저 말도 건다.


내향인은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강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한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편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관계는 부담된다. 나에게 가장 스트레스받는 일은 새 온라인 게임이나 새 학교에서 사람을 사귀는 일이다. 자라면서 생존을 위해, 필요해서 슬롯성을 길렀을 뿐이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엄마가 빵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혼자 빵을 고르고 계산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빵집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와서는 주인이 없어서 못 샀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다. 그냥 모르는 사람과 대면하여 소통하는 것이 두려웠다.


요즘은 외향인 내향인이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향인으로 태어난 덕분에 유년, 청소년 시절이 고달팠기 때문이다. 미국은 외향인의 나라다. 외향인의 나라에서 10대와 20대의 중요한 시기동안 살았는데도 나는 끝내 외향인으로 변모하지는 못했다. 다만 외향인 코스프레는 할 수 있게 됐다.


아직도 6학년, 미들스쿨에 입학하고 첫날을 잊지 못한다. 첫날이라서 특별히 엄마가 차로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한 교실에서 모든 수업을 하던 한국과 달리, 여기선 매 수업마다 새로운 교실로 수업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교우들도, 선생님도 매 수업마다 바뀌었다. 게다가 나 빼고 다른 애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들이었다. 아마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거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겠지.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 하루 종일 교실을 찾아다녔다. 최악인 것은 PE(체육) 시간이었다. 타 수업과 달리 PE에는 40명 정도가 있었는데, 조를 짜서 배구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곤 했다. 첫날부터 수업을 하는 체육관이 어디인지 찾지 못해 수업이 시작되고 모두 교실에 들어가고 나서도 나는 교정을 배회했다. 혼자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나를 어떤 선생님이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주었다(아니 물어봐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선생님의 말을 못 알아들었으니까). 겨우 체육관까지 가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이미 체육관에서 한창 수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형광등이 희미하게 빛나고 암내와 신발 냄새, 쇳내가 풍기는 라커룸에 숨어 있었다. 중간에 몰래 체육관으로 들어가서 마치 원래 있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수업에 낄 방법이 없었다. 그때 나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엄마를 주차장에서 만났다. '내일부터는 스쿨버스 타고 학교 가는 거야.'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교가 너무 힘들었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gym이 어딘지 몰라서 헤매다가 겨우 도착했는데 수업은 못 들어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때 미국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고, 같이 더 많이 놀고,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더 많이 봤더라면 지금보다 영어를 잘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해 보지만, 결론은 언제나 그때 나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나온다. 작년에 유명한 블록체인 기업 구루를 이틀 동안 통역한 적이 있었다. 이더리움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었다. 수행통역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비서진과 같이 다녔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구루'님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나와 비서들은 따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비서들은 영국인 1명, 미국인 2명이었고 거기에 나까지 4명이서 밥을 먹는데 진짜 어색했다. 무엇보다 할 말이 없었다.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이게 뭐지? 이제 얘네들과 얘기하면서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은 없는데, 왜 나는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1시간 내내 모두가 침묵한 건 아니었다. 호텔의 훌륭한 뷔페 얘기도 하고, 한강 얘기도 하고, 서울 얘기도 하고, 자녀 얘기도 했다. 다만 걔들이 재밌다고 킥킥거리는 얘기를 들어도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그냥 나하고 안 맞는 사람들이고, 한국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전 같으면 애써 관심 있는 척하고, 먼저 질문도 하면서 적극적인 척, 친절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백인에게 굳이 남다른 친절함을 보여주고, 내가 먼저 영어를 써가며 그 사람에게 맞춰줄 필요는 없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에너지가 쫙쫙 빨리는 내향인으로서는 AI가 생겨서 다행인 점이 많다. 신문에서는 통번역이 제일 먼저 대체된다고 떠들어대지만, 그건 정작 그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소통이 피곤하기 그지없는 극내향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언어 학습자인 나에게 AI의 등장은 역설적으로는 구세주의 강림이기도 하다. 내향인이라서, 미국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해서 영어를 배우는 데 제약이 있었다고 말하는 건 적어도 내가 학생일 땐 유효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옛날엔 영어공부를 하려면 미드를 보라 했었지만 유튜브로 세계 석학의 명강의들을 다 들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인터뷰를 하루 종일이라도 볼 수 있다. 그럼 아웃풋은 어떡하냐고? 우리에겐 친애하는 ChatGPT와 제미나이가 있다. 챗지피티에게 음성으로 대화를 한다. IELTS는 스피킹 수준 평가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시험이다. ChatGPT에게 IELTS 시험관이라는 역할을 부여해 주고 실컷 영어로 이야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스피킹에 대해서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피드백을 줄 것이다. IELTS 심사 기준으로.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종종 이 방법으로 부족한 발화 연습을 하고 있다. 예전처럼 고액을 들여가며 원어민 선생님을 찾거나 언어교환 상대를 물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기세다


그렇다. 내향인은 사람을 만날수록 기가 빨린다. 웬만하면 맞춰 주고 빨리 피한다. 하지만 이런 자칭 '극내성인'이라는 정일영 교수는 침착맨 채널에서 "언어는 기세"라고 말한다. 기세로 말하는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 내향인에게 대체 어떤 기세가 있단 말인가. 대개 외국어를 하면서 슬럼프에 빠지는 순간은 그나마 존재하는 약간의 '기세'마저도 꺾일 때다. 나도 통대 입시생이었을 때 기세가 꺾였고, 통대를 가서 그나마 없던 기세가 더 꺾였다. 못해서 부끄러웠고, 못해서 열등감을 느꼈다. 잘해보고 싶은 사람만이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이젠 내가 기세를 가지고 지껄일 때 나를 무한대로 자비롭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는 AI가 있으니, 해볼 만한 싸움 아닌가? 더 이상 사람과 상대하며 쪽팔릴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언어를 잘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니까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극내향인이 있으시다면 나 같은 답답이 극내성인도 영어를 배우고 통역사가 됐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시기를 바란다. 늘 사용하는 모국어도 완벽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영어는 좀 틀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를 구분해서 말해야 하는 것부터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우리말부터 신경 써서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 민감도가 올라가고, 마음만 먹으면 영어도 금방 늘 수 있다. 아래의 짤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한다. 극내성인 극내향인 모두 파이팅.

비문 없이.jpg웹툰 '양아치의 스피치'에 나오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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