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통역사의 자녀는 영어를 잘할까? -상-

???: 집에선 아이랑 영어로 말하시겠네요?

by캐롤

집 근처에 자주 가는 삼계탕집이 있다. 밥 하기 싫은 날, 만만하게 들르던 그곳에 둘이 아닌 셋이 되어 처음 방문했던 날이다. 주문을 마치고 앉아 있는데, 서빙하던 아주머니가 유독 갓 돌을 넘긴 우리 아이를 귀여워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 테이블을 오가며 툭툭 던지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아 의자에 앉은 아이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집에서 가져온 그림바카라 두어 권을 꺼내 보여주는데, 그릇을 치우던 아주머니가 한 마디 보태셨다.


“영어바카라 많이 읽어주세요.”


으레 어른들이 하시는 “애한테 잘해줘라”, “이때가 제일 예쁠 때다” 같은 덕담인 줄 알고 넘기려는데, 아주머니는 오며 가며 계속해서 “지금부터 읽어줘야 좋다”는 둥 비슷한 말씀을 몇 번 더 얹으시더니, 계산대에서 마침내 쐐기를 박으셨다.


“우리 딸이요, 대원외고 나와서 싱가포르 국립대 갔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영어로만 바카라 읽어주며 키웠다니까.”


물어보지도 않은 딸자랑을 초면인 손님에게 쏟아내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 딸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우셨나 보다 싶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영어 원어민도 아닌 부모가 인위적인 영어 노출 환경을 조성한다는 게 얼마나 결연한 의지와 꾸준함의 산물인지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하지는 않고 있다.


나는 이 질문을 정말이지 지겹도록 받았다. “통역사님 아이는 영어 잘하죠? 집에서 영어로만 대화하세요?” 그럴 법도 한 게, 남편마저 통역장교 출신이다. 유학 시절을 함께 미국에서 보낸 ‘통역 커플’이니 자연스럽게 서로 영어를 쓸 거라 오해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집에서 영어로 대화한 적이 없다. 영어를 쓰는 건 해외여행을 가거나 업무상 외국인을 만날 때뿐이다. 한국인끼리 한국에서 굳이 영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란, 수준 저하를 우려해 억지로 규칙을 만든 미인가 국제학교 같은 곳에서나 벌어지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조차 원어민이 아닌데 한국어보다 영어를 쓰면서 아이에게 영어노출부터 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실제로 통역사로서의 나는 ‘영어를 공용어에 준하게 쓰는’ 국가 사람들이 영어를 정말 잘하는 경우는 반반에 그친다고 본다. 내가 만난 사람들에 한해선 그랬다. 하물며 공용어도 아닌 한국에서 아이를 모국어보다 영어에 더 친숙하게 만드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


내 지인의 아들은 이름난 영어유치원을 다녔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한국어가 어눌해 한동안 따돌림을 당했다. 그 나이대라면 마땅히 공유해야 슬롯적 소통을 한국어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모두 토종 한국인인데도 아이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이 아니라 모노링구얼(Monolingual)이 된 셈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더니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어가 어눌할 정도로 영어에 친숙해졌다면 그 유치원에 보낸 것이 아주 성공적인 게 아니냐고.


도곡동에서 가르쳤던 또 다른 아이도 생각난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원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과외를 받던 아이는 발음도 좋고 성실했다. 하지만 영어 시험 성적은 늘 70점대에 머물렀다. 원인을 파악하다 경악했다. 그 아이의 국어 점수는 100점 만점에 고작 10점대였다. 국어와 영어 모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어만 앵무새처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문해력도 문제였고, 어휘도 부족해서 영어로 수준을 높여도 아이에겐 한계가 있었다.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듯, 남는 게 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엄마는 아이 국어 점수가 망가져도 아이가 영어학원에 얼른 복귀시키는 것만을 목표하고 있었다.


아이가 학원에서 읽는다는 바카라을 보여주었는데, 도저히 이해하고 읽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읽게 시켜 보니 읽기는 하는데, 전혀 이해를 못 했다. 슬픈 건, 그걸 학원에서 학부모에게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학원은 아이가 따라오든 말든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된다. 아이는 누구에게도 학원에서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한국어는 상관없고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많이 생각하게들 된 걸까.


- 하 -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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