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
대학생 때 나는 오랜 방황 끝에 신문방송학 대신 영문학으로 전공을 결정했다. 문학이 좋아서 20%, 허세 80% 정도 비중의 결정이었다.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기를 바랐고, 신문방송학은 혹시나 언론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전공일 것 같았다. 반면에 영문학을 전공하면 언론사 시험을 모두 떨어져도 하다 못해 어디 학원에는 취업해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국 유학생에게 영문학은 인기 없는 전공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나름의 희소성이 있을 거야-라는 논리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대학생은 이렇게 무섭다.)
닥치는 대로 밀린 필수과목을 채우다 보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정상적인 타이밍에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겪지 않을 일이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아직 이수 못한 전공필수과목이 3-4개나 있었다. 게으름과 안일함의 처절한 대가로 중간, 기말 시험 기간에는 일주일에 도합 40페이지 가까이 페이퍼를 써낸 것 같다.
뒤늦게 나는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전공 선택 과목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한인 학생들 사이에는 영문과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마침 전공 선택+지역슬롯봉사 교양 요건까지 모두 충족하는 수업을 찾았다! 지역슬롯에 지정된 기관에서 자원봉사 20시간을 채우고 한 학기에 페이퍼 3개만 쓰면 되는, 수월한 수업이었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라마다 각자의 '국민성'이라는 것이 실제 있다는 걸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수업이 지역슬롯봉사가 필수포함인지 모르고 신청했다. 그냥 교수 평가 웹사이트에서 교수님의 평점이 매우 높은 것만 확인하고, 무난히 A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며 시간표에 넣었는데, 첫 수업부터 인근의 시설 몇 군데를 두고 선착순 지원을 받는 것이다. 대충 캠퍼스 반경 20km 이내 위치였던 것 같은데, 차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모두 멀었다. 캠퍼스 코앞에 붙어있는 영어교습시설 딱 한 곳만 빼고. 그냥 캠퍼스 바로 옆에 걸어가면 되는 거리인데도 아무도 거기엔 신청하지 않았다. 나 역시 잠깐 고민했지만 압도적인 위치의 편리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 자원했다.
왜 아무도 신청을 안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난민 거주시설 안에 있는 영어교습소였다. 주로 북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아주 드물게 몽이나 베트남 사람이 있었다. 교습소에 봉사 신청 확인서를 받으러 처음 가던 날, 집을 나설 때부터 스멀스멀 두려움이 올라왔다. 사실 그곳은 캠퍼스 최악의 우범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총기 사건도 빈번하고, 총기 괴한이 바로 옆에 있는 캠퍼스를 배회해서 대피 경보 문자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냥 30미터 걸어가는 건데 뭐.' 나에겐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기관들은 정원이 모두 찼고, 지금 와서 다른 수업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위치도 잘 찾고, 내가 보조할 선생님도 잘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관리사무실을 나와 캠퍼스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영장에서 킥판으로 물을 때리면 나는 큰 소리를 혹시 아는가? 아마 발을 세게 굴러서 낸 소리 같았다.
Chick! What are you here for? 야! 여긴 왜 왔어!?
멀리서 내 나이 또래로 되어 보이는 한 흑인 남자가 나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특별한 행동을 하거나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혼자였기 때문에 그냥 위협해 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 들자마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뛰어서 도망가면 오히려 자극시켜서 쫓아올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이래서 아무도 지원 안 했구나!' 심지어 그때는 한창 밝은 낮 시간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러다 나도 총 맞는 거 아냐?'
봉사활동을 가는 요일이 되면 바짝 긴장한 채로 집을 나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첫날 선생님은 수강생들 모두에게 나를 인사시키셨다. 나이는 대개 3-40대, 간혹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특유의 체취와 강한 사향 냄새에 머리가 아파왔다. 선생님이 칠판 앞에서 가르치시고, 나는 바카라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알파벳 획순이나 발음을 알려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수강생들을 한두 바퀴 돌아보니 금세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수준의 편차가 심했다. 어떤 사람은 간단하게 오늘의 날짜와 자기소개 정도는 할 수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알파벳도 거의 몰라서 선생님이 칠판에 쓴 문장을 그림 그리듯 베껴 그리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저마다 자기 나라 언어로 이야기하느라 교실은 왁자지껄했다. 알파벳을 그림 그리듯 따라 그리던 아저씨에게 When, come here? 이렇게 물어보며 언제 미국에 왔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상당히 멋쩍게 흐흐 웃으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흠... 끝나고 선생님께 여쭤봤다. 이 사람들은 언제부터 여기서 영어를 배운 거냐고.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 사람은 10년 넘었지. 이 사람은 7년쯤 됐고."
"네? 그런데 아직도 one to 50 숫자를 배우고 있어요?"
"그래 맞아! (Yeah, that's right!)"
적응되지 않는 머리 아픈 냄새, 채광이 거의 없어 어두침침한 교실에 빛나는 형광등, 쉬는 시간에는 모르는 언어로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 조용히 혼자 앉아있는 것. 정말 가기 싫어지는 환경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부탁을 하셨다. "오늘 릴리가 수료하는 날인데, 수료 테스트를 보고 잘했는지 채점 부탁해." 역시 릴리. 그녀는 우리 반의 유일한 모범생, 유일한 에이스였다. 베트남에서 왔고, 교실에서 홀로 동양인이었다. 릴리는 시험지 빈칸에 I am going grocery shopping 같은 말을 곧잘 적어 내려갔다. 당연히 패스였다.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셨고, 그녀도 뿌듯함과 감동을 느꼈는지 모두가 마음 모아 박수를 쳐줄 때 활짝 웃었다. 그렇게 그녀는 ESL을 수료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궁금해졌다. 온 지 2년도 안 되어 ESL을 수료하고 떠나는 릴리도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지? 매 수업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친절하게 영어 단어도 발음해 주고, 모르는 단어는 대신 써주기도 했지만, 의문점은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더 답답했던 건, 매주 와서 보는 학생들의 수준이 전혀 진척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유독 북아프리카나 몽, 베트남계 난민이 많았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바로 내가 가던 곳이었고, ESL 프로그램 역시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난민들은 생계비와 주거, 영어교육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으며 그 시설에 거주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나라에서 지원해 주니까 영어수업에 오기는 했지만 영어를 배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서였을까. 학기가 끝나가고, 나의 봉사활동도 몇 회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선생님에게 물었다.
"저들은 왜 열심히 하지 않는 거죠? 왜 매일 수업에 와도 발전이 없는 걸까요?"
선생님은 도리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저들은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트라우마를 겪고 미국에 온 거야. 저 사람들은 그냥 살아서 안온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거라고."
지금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의 시간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의 감성적인 레토릭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그 땅에서는 한낱 노란 얼굴의 이방인이었다. 밤낮으로 영어를 따라 하고, 사전을 뒤져 가며 꾸역꾸역 언어와 문화를 흡수하려고 몸부림쳤던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저들은 지옥의 내전과 핍박을 떠나 자유의 나라 미국에 왔으니 더 나은 삶을 일구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특히 7년, 10년을 동일한 ESL수업을 받으면서도 알파벳으로 자기 이름 쓰는 것조차 헷갈려한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경악할 일이었다. 처음에는 답답함과 한심하다는 생각이 점차 안타까움을 넘어 궁금함으로 바뀌었다. 강의가 이어지는 동안 교실 뒤편에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19세기 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먼 동방의 나라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으며 그들은 어떤 미래를 생각했을까.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연한 의지로 이 나라에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운 사람들. 나라가 개방을 하기 전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세운 시설로 서양 학문이 들어오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렇게 잿더미뿐이었던 나라에서 그저 열심과 성실로 아이들을 키워 냈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뿐이라 미친 듯이 공부하며 큰 나라들을 추격해 왔다. 피, 땀, 눈물로 역경을 극복하고 삶을 일구어간다는 서사는 한국인인 나의 DNA에는 있었지만 그들에겐 없었던 것 같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국가 복지의 이면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된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개로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나라에서 주는 혜택만으로 만족하며 산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 난민들에게 물고기를 스스로 잡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을까? 종신토록 물고기 한 마리씩 계속 배급하는 것이 옳을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스스로 물고기를 잡게 하는 것이 옳을까.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다. 그분들은 이제 ESL을 졸업하셨으려나. 진정한 복지는 그저 안락한 거처와 약간의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고 싶게 만드는 마음을 심어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