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1864년 9월 24일, 동래 역참
"나으리, 오밤중에 죄송합니다."
"……"
대답이 없자 역참 문밖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으리… 밤중에 죄송합니다. 안에 계신지요?"
동준은 마루에서 몸을 일으켜 장지문을 열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역졸의 얼굴이 들어왔다.
"웬 소란이냐. 삼경(三更)이 넘은 시각에.”
"초량왜관에서 긴급한 전갈이 날아들었습니다! 대마도주가 보낸 국서가 오늘 밤 안으로 한양을 향해 말을 올린다고 합지요!”
"한밤중에 국서를?"
동준의 미간이 단숨에 좁아졌다. 단순한 교역 서계(書契)가 야행을 탈 리 없었다.
"동래부사 대감이 직접 전령을 추려 마방으로 보냈다 합니다. 도성에서도 이미 뭔 기별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동준은 한숨을 낮게 내쉬며 옷깃을 여몄다.
"결국 고생하는 건 말과 서신이 오가는 역참을 지키는 관리일세. 내가 자청해서 여기로 보내달라고 했으니 달리 방도가 있겠는가."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전령이 닥칠 텐데, 잠깐 벽에 기대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나으리. 제가 망을 보다가…….”
"자중하게. 행여 그러다가 부사대감께 걸리는 날에 나는 파직을 면치 못할걸세. 기껏 고생해서 과거시험에 합격했는데, 제발로 전하께서 내려주신 벼슬을 걷어찰리 있겠는가. 내 비록 역과(譯科)에 합격한 왜학(倭學)쟁이이지만, 관직에 오른 자가 제 할 일도 못하면 쓰겠는가."
"소, 소인이 나으리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요.”
역졸이 고개를 숙이자, 동준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동준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마당에 횃불이나 올리게. 말굽 소리가 곧 들이닥칠 것이네.”
마당에 세워둔 횃대에 불씨를 당기던 만석의 등 뒤로, 동준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이어졌다.
"자네 눈에는 내가 왜 이 먼 변방 구석을 자청해 내려왔는지 의아하겠지."
동준은 동래읍성의 캄캄한 성곽 능선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역참은, 특히 동래성 바로 앞에 있는 이 역참은 왜관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물자가 모이는 기착지네.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제 눈으로 보려면 여기가 첫자리요, 끝자리인 게지. 한양 서고에 가부좌 틀고 앉아 백 년 전 문서나 베끼는 자들은 평생 모를 테지만……”
만석이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한양 사대부 댁 자제분들은 다들 도성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귀양이라도 가는 줄 알지 않습니까요. 나으리 같은 분이 어찌 이 궂은 곳에서…….”
역졸이 황급히 제 입을 막자 동준은 피식 짧은 실소를 흘렸다.
"다른 의과나 율과 합격자들은 모르겠으나, 나처럼 역과에 합격한 급제자는 역참에서 일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네. 선친께서도 그러하셨고."
"그리 깊은 뜻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자네야말로, 그만 들어가서 눈 좀 붙이게. 역참은 나 혼자 보고, 전령을 잘 맞이할 테니 걱정 말고."
손을 내젓자 만석은 머리를 조아리고 행랑채 쪽으로 물러났다.
동준은 홀로 역참 마당에 섰다. 밤바람이 그의 도포 자락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어둠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하여 동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으나, 이는 나뭇가지를 거칠게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결의 착각일 뿐이었다. 사위는 여전히 먹물을 풀어놓은 듯 깊고 적막했다. 곧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스쳤다.
밤은 깊었고, 깜깜한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반짝이며 고요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멀리 동래읍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드러나 보였고, 초가로 덮인 마을 지붕들은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풀내음이 여기저기서 은은히 올라왔고, 풀벌레들의 소리가 어두운 정적을 깨고 귓가를 맴돌았다. 바람은 잔잔했으나, 그 속에는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초량왜관이 가까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듯한 짠 기운이었다. 동준은 역참 앞에 서서 그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긴 채, 곧 도착할 전령을 기다렸다.
잠시 그는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한학을 전공한 유학자 안국과 그의 첩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는, 타고난 신분의 한계 때문에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과에 응시할 길이 막혀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함과 글재주, 그리고 남다른 기개를 모두 갖춘 동준을 알아본 이는 삼촌 안국균(安國均)이었다. 대대로 역관(譯官)을 배출해온 집안의 가장이었던 안국균은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동준은 그렇게 역관의 길로 들어섰다. 비록 문과는 아니지만,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었다.
의부의 가르침 아래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역관이 된 여러 형들과 함께 공부하며 동준은 성장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동준의 가슴 속에는 남모르는 뜻이 하나 있었다. 의부는 일찌감치 그 특별함을 알아보았다.
"군자거지 하루지유(君子居之, 何陋之有)라 했거늘, 너는 이 뜻이 뭔지 아느냐?"
"예, 아버님.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구절이옵니다. 공자께서 구이(九夷, 아홉 오랑캐 나라)에 가서 살고자 하셨을 때 어떤 이가 묻기를, '그곳은 누추한데 어찌하시렵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자가 거처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요."
"너는 이 구절을 어찌 생각하느냐?"
"만약 그 땅에 도덕을 실천하는 군자가 있다면 민족의 우열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소신은 예를 실천하고 학문에 힘쓰는 슬롯가 곧 중화(中華)라 생각합니다."
"너는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이 시대 조선 사대부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예, 짐작하고 있습니다."
양부는 부드러운 눈으로 동준을 직시했다.
"내 너에게 역관의 본분을 일러줄 터이니 잘 듣거라. 우리가 왜 오랑쾌들의 말을 통역하는지 아느냐? 모든 인간은 한족이든, 조선인이든, 왜인이든, 여진이든 다 마찬가지니라. 단지 예를 아는 정도가 다를 뿐, 그 어느 땅에도 군자의 덕(德)과 도(道)가 들어선다면 그곳이 곧 문명이니라. 우리는 서로 다른 문명을 연결해 주는 가교이니, 먼저 되었든 나중에 되었든 중요하지 않다. 특별히 왜학훈도가 되고자 하는 너에게는, 일찍이 세종을 섬기고 세조와 성종 대에 영의정을 지내신 신숙주 대감이 남기신 문장을 하나 써주마. 그분은 영의정이셨으나 일곱 나라 말에 능통하셨던 사대부 중의 역관이셨다."
안국균은 병풍 뒤에서 아끼던 어사 벼루와 붓을 꺼내 들고, 힘차고 유려한 행서로 일필휘지했었다.
願國家無與日本失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면서도 또렷한,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소리. 바다 냄새를 머금은 묵직한 밤안개가 언덕을 집어삼킨 탓에 어스름한 형체는 어둠과 뒤섞여 윤곽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동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전령이 드디어 오는 것인가?'
그러나 초량왜관에서 여기 동래읍성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도 한 시간 반여는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파발마를 버리고 호위도 없이 한밤중에 홀로 걸어오는 전령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역참 벽에 기대어 앉아 기다리던 동준은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잠시 흐트러진 의관을 바로잡고 깃을 여몄다. 그리고는 역참 문 옆에 세워둔 횃불 하나를 집어 들어 불을 밝혔다. 어둠을 가르는 붉은 불빛이 사방을 물들이자, 동준은 그 빛을 앞세우고 멀리 걸어오는 인물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 한편을 짓눌렀다.
동준은 언덕길을 횃불로 밝히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다가갔다. 횃불의 불빛이 안개를 헤치며 앞을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것은 전령의 기민한 행색이 아니었다. 장옷에 싸인 여인의 실루엣이었다.
짙은 남색 무명 장옷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넉넉한 깃을 목 아래까지 단단히 여며 얼굴을 가린 틀림없는 여인이었다. 구월의 밤이슬에 젖어 다리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치마폭은 그녀의 걸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치마 아래로 드러난 겹바지 밑단은 너덜너덜하게 해져 있었다. 진흙 묻은 짚신을 질질 끌듯 신고 걸어오는 모습은 혼령처럼 서늘했다. 손에 든 횃불마저 없었다면 그녀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깊은 밤에 아녀자 혼자 밤길을 가다니,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오. 대체 무슨 일이시오?"
동준이 질바카라하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만약 하인이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를 안전한 주막으로 안내하라 분부했을 터였으나, 지금은 동준 혼자였다. 게다가 기다리던 것은 전령이었지, 이런 기이한 방문객이 아닐 터.
"혹시…… 숙소(宿所)…… 묵을 만한 곳이……”
동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왜인인가?
횃불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잡과(雜科) 왜학(倭學)에 급제한 통사(通事)가, 저 서툰 한국어 억양을 놓칠 리 없었다. 그렇다 해도 왜관은 설바카라(設柵) 너머 밖으로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금단의 구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어찌하여 일본국 여인의 몸으로 이곳에 서 있는 것이오? (いかにして日本国の女の身が, 此処に立っておられるのか)"
"도와…… 주시오…… (お助け...願いとう...ございます)"
여인은 그 자리에서 풀이 시들듯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장옷 자락은 어둠 속에서 나풀거렸고, 가느다란 손목에서 나비처럼 곱게 접은 서신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國家無與日本失和:
신숙주가 남긴 문장. 《해동제국기》를 찬술(撰述)하며 일본과의 화친을 강조한 그의 대일외교 철학을 담고 있다. "바라건대 조선은 일본과 화친을 잃지 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