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9월 26일, 교토, 기온(祇園)
불탄 서까래의 매캐한 잿내와 엉겨 붙은 핏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쓰시마의 특사 모리야마 시게루는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불에 타 흉물스럽게 드러난 가모가와(鴨川) 강변의 폐허 골목을 쥐새끼처럼 내달렸다. 한 달 전 교토를 불바다로 만든 금문의 변(禁門の変, 1864년 8월 20일)이 남긴 살기는 여전히 골목마다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아이즈 무사들의 쇠붙이 소리가 등 뒤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모리야마는 벽장 밑으로 몸을 바짝 욱여넣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찾아든 곳은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채 적막에 잠긴 낡은 료칸의 뒷방이었다.
방 안에는 한 사내가 창밖의 어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상급 무사의 격식을 벗어던진 거친 노기모노(野着物) 차림이었다. 며칠간의 도피를 증명하듯 짙은 감색 옷자락 끝은 해져 있었고, 흙먼지가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조슈번의 지도자이자, 막부가 사력을 다해 쫓는 수배자 카츠라 코고로였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모리야마 군."
카츠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쫓기는 자의 피로와 검객의 예기가 기묘하게 얽힌 눈동자였다.
"선생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금 교토 전체가 조슈 지사들을 사냥하느라 혈안입니다. 골목마다 교토 수호직의 막부군과 아이즈 번사들이 깔렸습니다."
"사냥이라……."
카츠라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울리는 표현이군. 하나, 진짜 늑대는 사냥당하지 않네. 잠시 발톱을 숨길 뿐이지."
그는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지난번 금문의 변 이후로 우리는 졸지에 조정의 적이 되었네. 아이즈와 사쓰마 놈들이 손을 잡을 줄이야. 쓰러진 동지들이 매일 밤 눈에 밟히지만, 살아남은 자는 이렇게 숨어 지낼 수밖에...... 승리감에 취한 아이즈 놈들은 지금 제 살을 뜯어먹는 중이더군. 며칠 전엔 나카노 유키노리(中野幸範)의 배를 갈랐다지."
모리야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카노 공마저 말입니까? 어전(御前)을 목숨 걸고 지킨 자를……."
"우리 조슈와 내통했다는 해괴한 구실을 붙였더군. 정작 우리는 낯짝 한번 본 적 없는 사내인데 말일세. 겁에 질린 개들이 아군과 적을 가릴 리 있겠나. 그 일족까지 싹 쓸어버렸다 들었네. 썩은 건 막부만이 아니야. 저토록 미쳐 날뛰는 아이즈 놈들도 결국 자멸할 걸세."
카츠라는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하지만 모리야마,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세. 서양 오랑캐들은 해안을 압박하는데 정작 칼을 쥔 자들은 제 피를 핥고 있어. 이제 '존왕양이(尊王攘夷)'는 배척의 구호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칼날이 되어야 하네."
쿵. 쿵. 쿵.
거친 마찰음이 문풍지를 흔들었다. 수색패였다.
"아이즈 놈들인가?"
"수색 번사 둘뿐인 듯합니다."
망을 보던 부하가 문틈으로 낮게 속삭였다.
"……해치울까요?"
카츠라의 낯빛에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으로 끌어들여 소리 없이 처리하게."
"예."
"이케다야(池田屋, 1864년 7월 8일)에서 깨달았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내게 천명이 남아 있다면, 오늘 밤 저들의 칼날 따위에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네."
문밖에서 주인의 아들 행세를 하던 부하가 황급히 등불을 켜며 앞장섰다.
"이쪽입니다. 방이 좁아서……."
두 번째 방의 문이 열리려는 찰나, 품속에서 뽑혀 나온 비수가 앞선 아이즈 무사의 등에 가차 없이 박혔다. 사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진 순간, 다른 무사의 가슴을 문풍지를 뚫고 나온 장도가 깊숙이 꿰뚫었다.
부하가 피 묻은 칼을 털어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카츠라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모리야마를 마주 보았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짐작하고 있겠지.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조선통이니까."
"얼마 전까지 부산 왜관에 머물다 번주의 급한 부름을 받고 올라왔습니다. 금문의 변으로 타격이 큽니다. 이리 쫓기기만 해서는 막부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쓰시마 번주는 뭐라고 하던가?"
"번주님은…… 표면적으로는 지사들을 돕고 계십니다. 사쓰마나 조슈와의 연을 끊을 수는 없으니까요."
모리야마가 말을 멈추고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저희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이 생명줄입니다. 수백 년간 이어온 관계와 이익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때가 되면 번(藩)도 도주(島主)도 모두 과거의 유물이 될 걸세."
카츠라의 단호한 음성이 방 안을 잘랐다.
"우리 일본은 군(郡)과 현(縣)으로 재편될 것이며, 만세일계의 천황 폐하께서 친히 다스리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탄생할 것이네. 그때가 되면 서양 오랑캐도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걸세."
"그간 우리 쓰시마는……."
모리야마의 손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조선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아왔습니다. 조선 국왕에게 관직을 하사받고 그들의 신하인 양 굴신(屈伸)하며 살아온 세월이, 과연 대일본국의 무사로서 온당한 일이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내가 몸을 사린다고 비웃지. 하지만 나는 지금 굴신(屈伸)을 하고 있는 것이네. 굽힐 줄(屈) 모르는 자는 결코 멀리 뻗어 나갈(伸) 수 없으니까. 쓰시마도 마찬가지 아닌가?"
카츠라는 품에서 구겨진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거친 손가락이 멈추어 선 곳은 한반도였다.
"내란의 불길이 꺼지고 난 뒤를 생각해보게. 넘쳐나는 무사들의 혈기, 서양식으로 재편될 군사력, 그 힘을 어디로 쏟아야 하겠는가. 우리에겐 출구가 필요하네."
"정한(征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때와는 판이 완전히 다르네."
카츠라가 고개를 저었다.
"불과 몇 해 전, 광대한 대륙의 주인이라 자처하던 청국 황제가 서양의 함포 소리에 놀라 북경을 버리고 열하(熱河)로 도망치지 않았는가. 원명원(圓明園)의 보물이 잿더미가 되고 황제는 별궁에서 굴욕 속에 죽었네."
"모리야마, 자네는 즉시 부산 왜관으로 돌아가게. 가서 조선의 심장부를 꿰뚫어 보게나. 저들이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지, 실권을 쥔 흥선대원군이라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말이네. 특히 조선의 역관들을 유심히 살피게. 훗날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안에서 빗장을 풀어줄 자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동래 역참에 안동준이라는 젊은 왜학 역관이 한양에서 자청해서 내려왔다 합니다. 왜관 사정에 밝고 배포가 보통이 아니라 하니, 그자부터 은밀히 눈여겨보겠습니다."
"좋은 눈을 가졌군. 지금 이 자리 우리들의 혜안이 훗날 대일본제국의 초석이 될 걸세."
모리야마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카츠라는 가부좌를 튼 채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나 카츠라 코고로가 도망자라는 오명을 지우고 키도 타카요시(木戸 孝允)라는 본명을 꺼내 드는 날, 신공황후께서 무릎을 꿇리고 조공을 받았던 우리의 옛 영토 삼한(三韓)을 회복할 걸세. 뒤틀린 질서를 바로잡는 복고(復古)의 역사 말일세."
서리 친 밤에 (霜の夜に)
붉게 피는 매화는 (赤く咲く梅)
야마토 정신 (大和魂)
가모가와 강변의 바람이 문풍지를 서늘하게 울렸다.
기온 유곽의 등롱은 여전히 붉었으나 샤미센도 웃음소리도 끊긴 적막이었다.
피 묻은 칼날과 잿더미 속에서, 바다 건너 조선의 목을 죌 칼날이 차갑게 벼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