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다
매일 아침, 오늘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한다. 매일이 스케줄 없는 주말 같은 날들이다. 물론 행복하다.
그럼에도 이전에 이야기했듯, 잉여롭지만 자발적인 몰입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
무엇이든 좋다.
일단 궁금한 건, ‘뭔가를 한다’는 것의 정의이다. 단순히 지금처럼 소비만 하며 살아가는 것은 뭔가 하는 게 아닌 걸까? 그것은 양심상 뭔가 ‘한다’라고 쳐줄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소비를 너무 중구난방으로 해서일까? 테니스도 하고, 여행도 가고, 사치품도 사고, 바카라도 사서?
소비만 한다고 해서 그걸 ‘한다’라고 쳐주지 않는다면 그건 다소 억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뭐 해?”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안 해, 놀아.”라고 대답한다.
맞다. 이건 노는 것이다.
그러면 양심적으로 생각해 본다.
금전적 대가를 받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무상일지언정 노동을 해야 하는가? 결국, 무언가를 생산해 내야 하는가? 확실히 이런 것들은 무언가 ‘한다’라고 당당히 말하기에 거리낌이 없다.
다음으로 무언가를 생산해 낸다는 것의 기본적인 전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속성, 매일은 아니어도 오늘 그리고 모레, 다음 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이어서 하는 것. 그게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는 것. 그게 아닐까? 그래야 그 시간들의 결과로 어떤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글들을 매주 한 편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지속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 그것을 하고자 한다. 하고 싶다.
자, 다시. 무엇을 할까? 여기선 말문이 안개 낀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버린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과거를 생각해 본다. 노동하던 시절의 나는 어떠했나.
노동의 스트레스를 취미로 승화시키는 게 좋다는 슬롯적 세뇌는 나 역시도 걸려 있었다. 운동이든, 그림이든, 독서든, 하다못해 모임이든 무언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그때도, 여전히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가물가물하지만 뭔가를 열렬하고 의욕 있게 하고 싶었던 적은 20대까지가 아니었나 싶다. 슬롯생활을 시작하며 이 의욕은 곤두박질쳤다.
에너지가 있다면 일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취미도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주말에는 평일에 일하기 위해 가급적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로 이미 무언가를 너무도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해서 꾸준히 생산해 내고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 먹고살았으니까, 반쯤은 내 의지이기도 했다.
그냥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변명이었다.
갑작스럽게 은퇴를 하고, 매일의 노동 루틴이 사라지자, 이제는 ‘정말로’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압박감이 시작됐다. 그건 여름밤 왱 소리로 잠을 깨우는 모기처럼 귀찮지만 심각하지는 않게 나를 괴롭혔다.
아무려면 나는 막 은퇴를 했다. 거의 한 달을 어둔 집 안에서 콘텐츠만 소비하며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간헐적으로 운동을 하며, 가끔은 사람들도 만나고, 때로 해야 할 것은 해내면서 그렇게 지냈다. 느릿하게, 평온하게. 압박받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오히려 노동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측면에서의 취미성 할 것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일단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의 반감으로 작동하던 의욕마저도 휘 사라져 버렸다.
곧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바카라감은 사라지고, 뭐 어때, 하는 배 째라 식 편안함이 찾아왔다. 적당히 활동하고 생활하면서, 나는 단지 무언가를 꾸준히 생산하지만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빠지지 않았다. 아니, 더 좋아졌다.
내 자산은 조금 더 늘어났으며, 더 괜찮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경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내일 해도 된다. 그게 뭐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라면, 그때의 내가 해 줄 것이다. 나는 그 정도는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름밤의 왱 모기 소리처럼, 마음 한구석 의문이 든다.
왜 하고 싶은 게 없을까? 나만의 문제일까? 나는 그냥 게으른 걸까?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낸다는 것은, 단순히 한 문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생산을 위해 나는 매우 편안한 지금의 상태를 포기하고 불편해져야만 한다.
놀고 싶은 시간을 포기하고 꽤 오랜 기간 동안 그걸 꾸준히 해야 하며, 모르던 것을 공부해야 하고, 억지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늘어간다.
억지로 해 보려고 해도 잘 안 되면 짜증도 난다. 그러면 이제 이걸 해서 뭐가 되는데, 떼돈 벌 수 있어?라는 질문이 나온다.
즉, 결과가 보장돼 있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 쓸데없게 느껴지며 귀찮아진다. 맛있는 걸 먹거나, 낮잠을 자는 즉각적인 보상이 나를 강렬하게 유혹한다.
무언가를 하는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마냥 즐거움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야기했듯, 편안을 포기하고 해내야 하는 과정들인 것이다.
그런 걸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노라면, 매번 시도의 초입에서 포기해 버리게 된다.
자, 이건 나의 경우이다.
나는 의욕적으로 항상 무언가를 배우며 어떤 활동도 해내는 활발한 그런 인간이 절대적으로 아니다.
나는 매우 깊은 내향인이며, 잘하지 못할 것 같다면 아예 시작도 말아 버리는, 해야 하는 일은 가급적 미루는 게으름에 익숙해진 아주 평범한 인간이다.
게으르다는 소리를 장렬하게도 늘어놓는다고 누군가 말하겠지만, 나는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깨닫고, 인정하고, 감내하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도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며 생산하기 위해서는 결국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다시 노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노동을 하고 보상을 받아야만 바카라임이 생긴다.
계속해야만 하는 바카라임, 억지로라도 할 수 있는 원동력.
이왕이면 그 성과가 더 크면 좋다. 돈을 많이 벌거나, 내 글을 사람들이 와아 하며 많이 봐주거나. 희망이나 소망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더 기분이 좋다. 바카라임이 더 커진다. 지속성이 더 강렬해진다.
강한 보상, 더 큰 바카라임. 바퀴가 구르는 것처럼 쉽다.
이 글들이 나에게 좀 더 강렬한 바카라임을 지워주기를 희망하고 소망하며 쓴다.
바카라임이 생기면 한 글자, 문장, 고민했던 순간들이 즐거이 느껴지겠지. 즉흥적으로 구한 작은 공유 오피스 사무실에 투자한 비용도 아깝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