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에 대하여

소비의 짜릿함

은퇴를 하고 나서, 처음에는 이제 백수가 됐으니까 소비를 절제하려고 했다. 그래도 연봉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매 달 고정적으로 발생하던 그 현금 흐름이 이제 끊겼다고 생각하니 초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잠깐 동안은 이게 맞나, 눈알을 굴리며 손톱을 물어 뜯기도 했다. 어쩌면 재취업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보증금을 제외하고 모두 금융자산에 투자한 내 재산이 하루하루 출렁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내 월급 따위는 그저 손톱만 하다.


정말로 그랬다. 하루에 수천만 원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걸 보며 완전히 평안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러려니 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그걸 보고 이를 딱딱거리며 사고팔기 시작하면 금세 개털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니까, 돈을 좀 써도 되겠다 싶었다. 거센 파도 안에서 조금 더 찰랑이는 정도이겠다 싶었다.




해서 피부과에 수백을 써봤는데, 많이 자고 아무리 뭘 발라도 나아지지 않던 착색이 한 달 만에 눈에 띄게 좋아졌다. 피부 톤도 확실히 밝아졌다. 과연 괜히 비싼 건 아니구나 싶었다.


개인 여행도 하고, 가족들과 여행도 했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는 천만 원 이상이 들어갔다. 짧고 강렬하고 새로운 경험이었고 이 역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돈도 써본 놈이 잘 쓴다고, 배워가며 쓰고 있는 분야도 있다.




그건 바로 쇼핑,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럭셔리 쇼핑이다.


돈을 쓰고자 하면서, 분야로 따지자면 가장 많은 소비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강렬한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있다.


쇼핑에 있어서 과거의 나는 저렴한 것을 다양하게 사는 타입이었다. 반팔 티셔츠 하나에 5만 원만 넘어가도 비싸다고 생각했고, 겨울 보온 아우터도 20만 원이 넘어가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관성으로 백화점에서 애매한 컨템포러리 브랜드를 백만 원 넘게 사버리기도 했는데, 이건 지금 와서는 후회하는 일이다. 돈 쓰겠다는 마음이 앞서 매장 점원의 칭찬에 홀랑 넘어가 결제한 옷 수 벌은, 집에 돌아와 다시 입어보면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냥 그런, 안 샀어도 됐을, 차라리 그 돈을 아껴 명품을 사는 게 나았을 그런 낭비였다.


명품은 거의 10년 전에 해외여행 갈 때 한 달 고민해서 샀던 프라다 가방 하나뿐이었다.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지, 괜히 눈치 보며 샀던 가방이었다. 명품을 여러 개 사는 건 내 분에 맞지 않는 지나친 사치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럭셔리 브랜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에루샤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정도의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 정도만 들어봤고, 무엇보다 그들의 로고가 가득한 디자인이 뭣이 예쁜지 공감하지 못했다. 사실, 이건 지금도 적잖이 그렇다.


난 그런 거 별로 안 예쁘던데, 하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고, 럭셔리도 그렇더라.




동반자로부터 에르메스 게임이라는 게 있다는 걸 들었다. 픽 하고 웃었다. 뭐 그런 게 다 있어, 하고.


유명한 가방을 사려면 그 가방 금액만큼 에르메스에 돈을 써야 하고, 그 과정에서 셀러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명함을 받아 담당 셀러가 생겨야지만 가방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동해 찾아보니 가든파티부터 시작해서 버킨이나 켈리를 얻기 위한 스텝 바이 스텝 설명 블로그들도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하면서 에르메스의 상품들을 구경해 보니 마음에 드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물며 별 관심 없던 가방도 갖고 싶어졌다.


럭셔리 브랜드라서다. 그냥 여느 쇼핑 플랫폼에서 보는 가방이었다면 예뻐 보였을지는 몰라도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르메스는 특별해 보였다.


이왕 하는 거, 신세계 백화점에 3천만 원을 써서 내년 VIP 골드를 노려보자, 하면서 에르메스 게임에 뛰어들었다.




처음 구매한 에르메스는 사마르칸트 문진이었다. 에르메스의 상징인 말 머리를 멋들어지게 깎아낸 묵직한 장식품이다. 80만 원이었는데, 두근두근하며 개봉하고 사진을 찍으며 감동한 기억이 있다.


첫 에르메스, 사마르칸트


이를 시작으로, 나는 한 달 여 만에 신세계 백화점 본점 에르메스 셀러의 명함을 받아냈다.


거의 매주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에르메스 오픈런을 했다. 방문할 때마다 셀러는 바뀌었지만 특히 오브제에 관심을 보이며 ‘사마르칸트를 모으고 있는데, 다른 소재가 들어오면 알려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결국 오백여만 원을 썼을 때 즈음 홈 라인 담당 셀러에게 명함을 받을 수 있었다.


천만 원 정도를 쓰고 나서 슬쩍 물어봤다. ‘가든파티 혹시 볼 수 있을까요?’ 셀러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비밀의 방으로 안내했다.


자격 없는 자들의 시선이 차단되는 그 은밀한 공간에서 만난 건 블랙 캔버스 가든파티였고 나는 골드나 에토프가 입고되면 알려달라고 했다. 운이 좋게도 바로 다음 주에 입고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당장 달려가 599만 원짜리 가든파티 골드를 모셔왔다.




결과적으로 에르메스만 따지면 삼천여만 원, 신세계 백화점에 올해 2월부터 6월까지 쓴 돈은 오천여만 원이다. 15회 방문했다고 되어 있으니 1회 방문 평균 소비금액이 338만 원이다.


3,000만 원 골드 VIP를 노렸는데 5,000만 원 플래티넘 VIP가 되게 생겼다.


돌아보니 헛웃음이 나기도 하는 경험이지만, 에르메스와 백화점의 비즈니스 모델이 상당히 재미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대부분의 하이엔드나 프리미엄 전략들이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백화점은 VIP에게 공간을 제공한다. 에르메스급 브랜드는 모든 백화점에 입점해 있지 않다. 대부분 서울이다. 그것도 서울 중심부. 사람이 지독히도 많은 곳이다. 당연히 공간이 부족하다.


백화점 개장 시간에 맞춰 오픈런을 하지 않으면 평일에도 주차를 할 수가 없다. 에르메스에 입장하기 위한 오픈런이기도 했지만, 주차를 하기 위한 오픈런이기도 했다.


이리저리 몇 시간을 구경하며 떠돌다 조금이라도 앉아서 쉴라치면, 카페에도 사람들이 그득하다. 앉을 곳도 없을뿐더러 거의 도떼기시장이다.


나는 이제 내년부터는, 아무 때나 가도 주차를, 심지어 다른 사람이 해주기까지 하며, 지친 다리를 쉬이며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전용 라운지 공간을 제공받는다. 그게 뭐 대단해, 할 수 있지만 직접 쇼핑을 하며 겪어보니 굉장한 혜택이었다.


주차와 앉을 공간. 발품을 팔면, 그리고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VIP는 편하게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 돈을 좀 더 편하게 쓰게 해 주는 것이다.




에르메스는 기회를 제공한다. 에르메스에 입장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가든파티, 버킨, 켈리를 살 수 있는 기회.


가방을 판매해도 셀러의 실적은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가방이 아닌 오브제나 의류 등을 사야 셀러에게 도움이 된다. 이게 오브제나 접시 같은 것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다짜고짜 가든파티나 버킨을 원하면 셀러는 당연히 없다고 한다.


그러면 일단 셀러의 실적을 올려주어야 한다. 이 때문에 더러 관심도 없는 것들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사마르칸트 같이 관심 가는 제품이 있었다.


지금은 사마르칸트가 세 개, 에르메스 신발도 세 개가 있다. 어쩌면 소비하고 싶은 뇌가 무의식적으로 관심을 주었는지도.


그런 걸 구매할 때도, 한 방에 사는 게 좋다. 오늘 만난 셀러의 마음에 들어서 일단 명함부터 받으려면, 그 셀러에게 많이 팔아줘야 하는 것이다.


나도 네 번째 셀러에게 삼백만 원 정도를 한 번에 구매하고 명함을 받았다. 물론 이 금액은 셀러 입장에서 ‘많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다음에도 돈을 조금 더 쓰면, 이제 슬슬 가방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다. 내가 에르메스에 쓴 만큼의 가치를 하는 가방을. 내가 천만 원 쓰고 버킨을 물어봤다면 없다고 했을 것이다.


가든파티니까 내어준 것이다. 자신의 실적을 올려준 고객에게 주는 딱 그마만큼의 가치에 맞는 선물, 바로 가방을 살 수 있는 기회다.


이런 전략이라서 에르메스의 유명 가방들은 리셀가를 그래도 실제 판매 금액보다는 비싸게 유지하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야 돼?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파니까 특별하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갖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제품의 수량을 제한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건 아무나 가질 수 없어, 자격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야. 너 그거 돼?’


결국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는 것, 희귀한 것을 가지는 것에 대한 열망을 건드린다. 수량이 적다는 것, 그리고 그걸 사람들이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특별해진다.


이런 정바카라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 나도 이런 정바카라에 매혹되어 에르메스를 가지고 싶고 백화점 VIP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정바카라은 유효하다.


아무려면 세계적인 기업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돈을 벌고자 연구해 내고 발전시킨 전략이다. 나 같은 범인은 거기에 걸려들지 않을 수 없다.




내 경우, 럭셔리를 입고 들고 다니니 다소간의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나 돈 좀 있어, 하는 으쓱한 느낌. 좀 역겨울 수도 있는데, 사실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보게 되는 것도 달라졌다. 루이비통 신발에, 샤넬 백과 치마, 흰색 고야드 가방을 들고 반클리프 아펠에 줄 서 있는 중국 여성. 로고가 드러나지 않아도, 아 저건 이번 SS시즌 에르메스 신발. 어라, 프라다 메인 진열 상품이 바뀌었네. 루이비통 SS 상품 들어왔을 텐데 구경이나 가볼까?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그런 것들을 소비하다 보면, 내가 돈 좀 있어 보이는, 뭐 좀 된 느낌이 든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대단한 기업 회장님도 아니고, 암을 정복할 차세대 DNA 기술을 연구하지도 않고, 예수나 부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돈은 조금 가지고 있잖아? 하면서 위안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 돈을 써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산다. 희귀하다는 느낌을 산다. 특별해지기에,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같은 맥락에서, 결국 백화점 VIP나 에르메스의 정바카라도, 돈이면 다 된다. 많이 쓰면 되는 것이다. 단지 돈이 충분히 많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 돈이면 다 되고, 나는 충분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기적으로 새로운 경험의 흥분에 취해 다소 무리했음을 안다.


오늘에서야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은 수 없이 많은 누군가들이 이미 경험한 것이며, 이것 이상의 초월적인 하이엔드 세계가 까마득하게 더 있을 것이다.


이 이상의 세계를 얼른 경험해 보고 싶지만, 그리고 아마도 조금은 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경험해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이 제한된 세계를 살펴보며 만족하려 한다.


따라갈 수 없는 것을 따라가려 하면 불행해지고 만다. 그게 사치다.


살 수 있는 사람이 사면 사치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사게 되면 사치가 된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괜찮다. 이 페이스대로 계속 이어가면, 사치가 되고야 만다.




속도를 좀 줄이고, 사고 싶은 사치품을 대기선에 차례대로 줄 세워 놓았는데, 얄궂게도 이제는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흥분과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사마르칸트를 처음 샀을 때는 매일 서재에서 사진도 찍고 쳐다도 보고 했는데, 이제는 먼지가 앉지 않길 걱정해야 한다.


여느 자극이 그렇듯, 결국에는 무뎌지고 만다.


그래서 익숙한 자극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29cm나 자라 앱을 연다. 세일을 기다리고, 사지 않더라도 홀린 듯 구경한다. 버릇일까, 아니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할 수 없어서 무의식이 찾는 대리만족일까?


그렇게 저렴하게 산 쇼핑의 결과물조차,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있다는 건 놀랍지 않은 일이다. 말했듯이, 무뎌지는 법이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소비의 결과물보다는 소비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설렘과 흥분에 절여져 낭비도 불사하는 그저 평범한 자본주의 인간인 것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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