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아이에게 숨습니다

by고로케

나는 마케터로서 카피라이팅을 하고는 했다. 고객에게 제품을 팔 수 있게 광고문안을 쓰는 일이다. 카피라이팅은 번역과 유사하다. 카피라이팅은 말 못 하는 제품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고객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 일이다. 자기가 얼마나 편리하고 뛰어난 기능이 있는지 고객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제품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영락없이 카피라이터의 손을 빌려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는 일종의 번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열매가 옹알이를 하거나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거나 무대공연 중 대사를 까먹은 신인 배우가 짓는 표정 마냥 나를 쳐다볼 때, 나는 늘 말 못 하는 열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다. 배가 고픈지, 잠이 오는지, 놀이가 지루해졌는지, 기저귀가 축축해졌는지 재빠르게 열매의 말을 알기 어렵다. 더듬더듬 점자바카라을 읽듯이 나는 열매의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 반대로, 열매는 과연 내 말을 이해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이제 갓 5개월 남짓한 아이가 얼마나 내 말을 이해할까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나는 열매에게 말을 건다. 그림바카라부터, 가끔씩 내가 읽는 바카라까지 나는 열매에게 읽어준다. 지난번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줬다. 그때 열매는 호랑이가 시금치 보듯 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열매는 내가 하는 말에 꺄르륵 웃다가도 뚱한 표정으로 내 말을 삼킨다.


어쩌다가 사소한 일로 아내와 말다툼을 했을 때 나는 열매에게 도망친다. 그곳은 아내와의 말다툼이 번지지 않는 안전지대이자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말은 가끔씩 상처가 되는 다툼으로 번질 때가 있다. 그래서 말은 불같다. 불똥 하나에 온 산이 불타듯이 티끌 같은 말 한마디가 화를 만들 때가 많다. 서로가 알아듣는 ‘말’로 소통하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잘못된 의도로 읽혔을 때는 곧잘 오해를 낳고 그것은 다툼이 된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열매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열매가 난데없는 울음을 터뜨릴 때는 달래느라 진을 빼지만 맑은 얼굴로 뚱하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볼 때는, 그 말 없는 얼굴이 잔잔한 바다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다 보면 아무 말 없는 열매의 얼굴이 바람만 흐르는 수평선 같은 고요함을 준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듯이 열매를 보고 있다면 마음속에 솟구치는 화도 어느새 파도에 휩쓸려 잠잠해진다.


그래서 열매는 나에게 무인도인 동시에 바다기도 하다. 열매라는 무인도에서 나는 열매와 단둘이 하루를 보내지만 무인도 해변 너머의 고요한 수평선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로 정형화되지 않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며 마음을 달랜다. 열매도 곧 엄마, 아빠를 말하고 나 또한 열매와 말로 소통하는 날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말없이 서로를 보듬어주던 지금 이 순간도 그리울 것 같다. 나에게 평화로운 바다였던 열매의 얼굴, “아빠가 나빠, 아빠가 잘못한 거야.”라고 정확한 의사표현을 하기 전에 이 바다를 마음껏 즐겨야겠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