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0년 남았다

by고로케

“이제는 길어야 20년이다.” 추석 때 열매 때문에 우리 부부는 고향이 내려가지 못했다. 부모님이 수원까지 열매를 보고자 역귀향 해주셨고 이제 스스로 남은 세월을 계산하셨다. 부모님이 60대 후반이니 이렇게 본인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이를 앞으로 20년 보셨다. 어릴 적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을 몰랐지만 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는 나는 이제 안다. 20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를지 말이다. 나도 이러한데 부모님은 20년이 얼마나 짧게 느껴질까.


추석이라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모신 용인에 있는 묘원에 갔다. 차가 막혀 늦게 도착했지만 외삼촌들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간단하게 외할머니와 인사를 하고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매 명절 때마다 엄마는 외삼촌들과 모이면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밤늦은 엄마 집 앞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자주 찾아와 춤을 줬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무서워서 엄마에게 문고리를 함께 붙잡자고 했다는 기억. 또, 어두운 밤에 산길 따라 호롱불만 들고 외할머니와 함께 무서움에 벌벌 떨며 동생을 마중 나가던 기억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런 엄마는 차 안에서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외할머니 딸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가난한 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되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그래도 외할머니 딸로 태어나고 싶어. 다른 엄마 딸로 태어나면 무서울 거 같아.” 외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사랑 고백이었다.


열매가 태어나면서 이제 나의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가끔 그 사실이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그건 마치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것만큼 생소하다. ‘이제 엄마가 할머니라고?’ 내 머릿속 엄마 모습에는 할머니가 없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엄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엄마를 그린다. 가끔 옛날 사진과 지금 모습을 봤을 때 엄마가 늙었다는 사실은 깨닫지만 늙은 것과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제 갓 태어나 처음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난 열매는 과연 우리 엄마와 아빠를 어떻게 기억할까?


엄마가 말한 “이제는 길어야 20년이다.”라는 세월은 매우 짧을 것이지만 그 시간 동안에는 많은 것이 변할 예정이다. 20년 후면 열매는 이제 갓 성인이 되고 나는 곧 은퇴를 준비할 나이다. 지금은 건강해 보이는 부모님도 20년 후에는 마음껏 본인 몸을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르는 나이다. 앞으로 20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 든다. 많은 것이 변화하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많은 것을 무던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기기 때문이다.


열매를 낳고 키우면서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이제 늘 내 시간 선상에는 열매가 있다. 5년 후는 열매가 유치원에 갈 나이, 10년 후면 열매가 나눗셈을 배울 나이, 15년 후면 열매가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 20년 후면 열매와 술 한 잔 할 수 있는 나이. 그 시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변화할 나와 열매 그리고 부모님과의 시간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준비가 필요하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