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기억해 주기

by고로케

김영하 작가는 10살 때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고를 겪었다. 그 사고 때문에 김영하 작가는 10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때 만약 과거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다면 티끌만 한 기억이라도 남아있었을지 모르지만 김영하 작가는 그러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과거를 잘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늘 뭐 하고 놀지만 늘 생각하지 ‘3년 전 그때 그 분유가 참 달콤했는데.’라고 잘 회상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끔씩 나는 내 기억의 시작점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내 첫 기억은 부엌 문틀에 빨래판을 비스듬히 세우고 미끄럼틀처럼 놀던 모습이다. 그때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놀라운 건 그 당시 내가 나를 지각하던 것과 달리 그 사진 속 나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 정도로 어렸다는 사실이다. 나는 심지어 사진관에 돌 사진을 찍기 위해 갔던 기억도 남아있다. 나는 사진 밖 사진관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외벽은 파란색 벽으로 칠해졌고 미닫이 철문이었고 내리막길에 위치한 사진관이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비교적 빈약하다. 단편적인 기억만 있을 뿐이다. 내 기억을 보조할 노트나 일기장과 스케치북들도 이사하면서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내 기록물을 챙기지 못해 후회한다.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그 당시 나는 과거를 돌보지 않았다. 10살 남짓한 아이에게 과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만큼 지금 자신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않기 때문이다. 가끔씩 그 사실이 안타까워 엄마아빠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조금만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줬으면, 조금 더 사진을 많이 찍어뒀다면, 그 당시 어린 내가 스스로 챙기지 못할 기록물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챙겨줬다면 어땠을까 말이다.


나는 매일 열매를 재우고 먹이고 씻겨주고 갈아주고 놀아준다. 한편으로 열매가 기억 못 할 자신의 과거를 대신 기록하고 기억한다. 나는 그것이 부모로서 꽤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육체적 성장을 위한 일뿐 아니라 기억을 보존해 주는 일은 나중에 열매가 자라서 자신의 생애 자산이 된다. 자기 기억 속에 그 모습이 없더라도 내가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게 하는 것,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알게 해주는 것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열매와 처음 문화센터에 가서 오감놀이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이제 4개월이 된 열매가 이것을 기억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로수 길을 열매에게 보여주면서 그 모습도 영상으로 남겼다. 와이프와 나는 열매에게 선물 같은 일상의 순간을 많이 남기고 열매 대신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자라던 시절과 달리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있고 SNS에 기록으로도 남길 수 있어 편리하다. 나는 조금씩 열매가 자랄 때마다 열매가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도록 우리가 남긴 기억들을 때마다 부지런히 꺼내 보여주려고 한다. 나는 열매가 어느 날 하늘에서 쿵 떨어진 것이 아니라 늘 좋은 과거의 기억들을 발판 삼아 자신의 앞을 스케치하고 채색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