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와 가끔 <까꿍 놀이>를 한다. 손수건으로 열매 눈을 가렸다가 손수건을 치우면서 ‘까꿍’이라고 말하면서 내 얼굴을 드러낸다. 열매는 무엇이 신나는지 꺄르륵 거린다. 열매는 지루해하지 않고 할 때마다 신나서 웃는다.
<까꿍 놀이>는 아이가 경험하는 첫 이야기 놀이다. 일본의 문학 비평가 오쓰가 에이지는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갔다가 돌아온다’라고 말했다. 마저리 플랙이 지은 <앵거스와 두 마리 오리>라는 어린이 동화 이야기를 예로 들면 이렇다. 앵거스라는 강아지가 있다. 앵거스는 울타리 너머에 보이지 않는 두 마리 오리 소리에 흥미를 느낀다. 앵거스는 울타리를 넘어서 오리에게 갔지만 오리의 공세에 겁먹고 다시 자기 집 소파로 돌아온다.
여기서 울타리 너머는 미지의 세계다. 울타리는 일상과 비일상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앵거스는 오리 소리만 듣기 때문에 울타리 너머의 세계가 궁금하다. 앵거스는 울타리를 넘으면서 이쪽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저쪽이라는 비일상의 세계를 경험한다.
하지만 앵거스는 오리에게 쫓겨 다시 자기 집 소파 아래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안식처였던 소파 아래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바로 이처럼 울타리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야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다.
<까꿍 놀이>도 마찬가지다. 얼굴을 가리는 손바닥은 경계선이다. 열매는 내가 있는 세계에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내가 없는 세계로 갔다가 손바닥을 치우면 다시 내가 있는 세계로 돌아온다. 열매는 불안과 안도감이라는 드라마틱한 감정을 오고 가면서 느낀다.
부모는 아이와 세상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의 문을 잠시 열어주기도 하고 내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양치기처럼 집안으로 다시 아이를 불러 모은다. 세상의 문을 열어주고 닫으면서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도록 돕고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아이는 그렇게 부모라는 문지기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이야기를 몸소 읽는다.
집안은 안락하나 재미가 없고 집 밖은 야생이나 재미가 있다. 부모라는 경계는 안락하지만 재미없는 집안과 재미있지만 거친 집 밖 사이 어딘가에 있다. 부모의 경계는 아이에게 재미를 줄 수도 있고 동시에 안락함도 제공한다. 어쩌면 부모의 본질적인 역할은 세상의 경계선에서 스위치를 켰다 끄는 역할이지 않을까. 세상의 재미를 경험하면서 꼭 마주하는 상처와 깨짐 속에서 부모는 그 경계에 서서 아이를 보듬어주고 자생할 수 있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열매는 지금 <까꿍 놀이>로 세상을 알아 간다. 손으로 눈을 가리면 아빠가 없다가 손을 치우면 다시 아빠가 뿅 하고 생기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세상을 배운다. 지금 열매에게 아빠와 엄마는 세상이다. 열매는 진짜 세상에 나가기 전에 그 세상과 열매 사이에는 있는 얇은 경계선을 배운다. 그것이 진짜 세상을 살아갈 열매에게 예방주사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