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낳으면 과거와는 다른 삶의 태도로 산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결혼 전에 나는 그것이 바카라임감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지켜야 하는 아빠로서의 바카라임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내 삶을 내다보았을 때 어른들이 말한 새로운 삶의 태도라는 것이 단지 바카라임감에서 기인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다 깊숙이 삶의 태도를 바꾸는 무언가가 있었다.
열매가 태어나 자신만의 삶을 우렁차게 외칠 때 나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이제 이 아이는 아무래도 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가능성이 큰 사람이다. 아이를 낳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이어서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모습의 죽음으로 남겨질까? 를 생각했다. 열매는 나의 죽음을 슬퍼할까, 후련해 할까, 아쉬워할까 등 내 죽음이 열매에 어떤 식으로 가닿을지 그렸다.
혼자 살다가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어차피 나만이 지켜보는 마무리라면 그 삶이 어긋나고 삐그덕 거려도 무슨 상관인가. 조금 서글프기는 하지만 온전히 나 혼자만의 바카라임으로 그 죽음을 감당하면 되는 노릇이다. 죽음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내 삶을 향한 시선이 하나가 더 생겼다는 느낌이다. 아이는 내가 걷는 뒤꿈치를 보며 따라 걸을 테니 내 삶을 방기하는 태도로 살 수 없다. 더 이상 내 죽음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다. 나의 핏줄이 남겨져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를 쓸 때는 띄어쓰기나 오탈자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악필이어도, 그 내용과 구성이 엉망이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내 글을 누군가가 볼 수밖에 없다면 바른 글을 쓰고자 한다. 내 삶의 페이지를 내 아이가 들여 봤을 때 본보기까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글로 채운 삶이었으면 한다.
내 삶을 향한 또 다른 시선이 느낄 때,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냥 가족을 먹여 살려한다는 원초적인 바카라임감이 아니라 누군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내 삶을 모습을 지켜본다는 생각을 하면 그저 해이하게 삶을 낭비할 수 없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세지고 좋은 죽음을 맞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죽음은 공공재 서비스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서비스를 쓸 수 있고 누구나 공평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그 자체는 누구에게는 비싸고 누구에게는 값싼 죽음도 없다. 삶에서 죽음이라는 좋은 서비스를 누구나가 누릴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쉬움을 남긴 채 이 서비스를 사용하고 누군가는 미련 없이 죽음을 사용한다.
내 삶의 마침표를 찍는 건 내가 아니다. 남겨진 사람들이 대신 마침표를 찍어준다. 죽음은 내가 마침표를 찍는 엔터를 누르기도 전에 예고 없는 택배처럼 찾아온다. 삶의 마침표는 내 삶을 완결된 형태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바로 그 역할을 해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핏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