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르:라그나로크>에서 자신의 국가인 아스가르다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야 백성이지.” 토르는 아스가르드라는 장소가 파괴될 것을 걱정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토르는 우주선에 백성들을 태우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다.
그냥 지나쳤던 이 영화의 대사가 다시금 떠오른 이유는 내가 지켜야 할 열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방향도 이 대사가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장소라고 하는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환경 세팅을 먼저 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사는 집도 주변 환경을 보고 선택했다. 갖춰지지 않고는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열매를 낳기도 전에 필요한 옷과 기저귀 갈이대, 침대, 유모차, 수유 시트 등을 사고 방도 미리 꾸미는 준비를 했다. 이미 아이를 낳아본 지인들은 그렇게 미리 준비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 조언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열매를 낳고 보니 꽤 많은 물건을 버리거나 되팔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실제로는 필요치 않거나 섣부르게 사거나 열매에게 맞지 않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열매를 위하는 마음에 장소를 만들었지만 정작 열매에게 아직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열매로부터 출발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육아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장소나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장소는 중요하다. 하지만 열매와의 상호작용이 없는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이라면 그곳은 무의미 하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얼마나 열매와 상호작용 잘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열매와 즐겁게 소통할 수 있다면 그곳이 우리 가족을 위한 새로운 장소가 된다.
가끔씩 나는 집, 자동차라고 불리는 이 장소가 다 사라지게 되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회사를 퇴사하고 난 후 그런 생각이 예전 보다 더 들었다. 지금 세상은 과거보다 불확실성이 가속화되고 유행은 빠르게 변하고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언제 길거리에 내쫓길지 모른다. 이런 불안감이 스멀스멀 혈관을 타고 기어오를 때 콩 벌레처럼 웅크린 채 꼬물꼬물 자고 있는 열매와 그런 열매를 안고 자는 와이프를 본다.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집과 자동차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장소임을 깨닫는다.
어느 가족은 문어도 미끄러질 맨들한 바닥에, 냉장고는 온갖 음식으로 꽉 차있고 수십 명이 숨바꼭질해도 될 집에 살고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는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없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단칸방에, 볼일 보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집에 살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이 있다. 물리적인 장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감이라는 장소, 가족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