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꽃

by김경훈

막차였다. 서울역에서 동대구까지 1시간 45분. 나는 3호차 특실 창가에 앉았지만 창은 나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유리 너머는 밤이든 낮이든 같은 두께의 어둠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으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걸 알았다. 출발의 떨림은 발뒤꿈치를 먼저 건드리고 나서 무릎으로 올라온다. 발밑에서 개가 한 번 몸을 뒤척였다. 5년을 함께한 안내견은 이제 출발의 진동에는 놀라지 않았다.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믿는 쪽이다. 눈이 있는 사람은 얼굴을 본다. 얼굴은 인간이 가진 가장 잘 훈련된 거짓말이다. 웃는 입과 슬픈 눈을 동시에 지을 줄 아는 게 얼굴이니까. 나는 얼굴을 지나쳐 그 아래를 듣는다. 숨의 간격 목을 넘어가는 침 손가락이 옷깃을 만지는 속도. 그런 것들은 훈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눈뜬 사람보다 사람을 더 정확히 읽는다고 믿어 왔다. 그날 밤까지는 그랬다.


객차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있다. 승무원이 밀고 오는 판매 카트는 바퀴가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두 박자로 덜컹인다. 이어폰을 꽂았는데도 소리가 새어 나오는 자리 통화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이는 자리 잠든 사람이 코를 고는 자리. 나는 자리에 앉기만 해도 객차의 지도를 그린다. 눈으로 그리는 지도보다 오래 남는 지도다. 커피 냄새가 세 칸 앞에서 흘러왔다. 카트가 내 자리까지 오는 데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종착이 동대구라 특실은 조용했다. 광명을 지나고 천안아산을 지날 때까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전을 지날 무렵 사람이 앉았다. 향이 먼저 왔다. 은방울꽃이었다. 봄에 잠깐 피었다가 마는 그 하얀 종 모양 꽃의 냄새. 나는 그 향의 나이를 맡을 수 있었다. 몸에 하루 종일 붙어 있던 향은 살냄새와 섞여 둥글어진다. 이건 둥글지 않았다. 방금 손목에 찍어 바른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갓 뜯은 풀줄기처럼 뾰족했다.


그리고 울음이 왔다. 소리를 죽인 울음이었다. 사람이 남 앞에서 울음을 참으면 숨이 계단처럼 끊긴다. 들이쉬고 멈추고 또 들이쉬고. 나는 그 계단을 몇 칸 세다가 그만두었다. 무릎 위 어딘가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떨었다. 진동은 규칙적이었다. 나는 소리의 간격에 예민한 사람이라 금세 알아챘다. 메시지가 오는 진동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마음처럼 제멋대로 온다. 이건 3분마다 정확히 한 번씩 떨었다. 알람이거나 타이머였다. 나는 그때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휴지 드릴까요." 나는 앞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옆으로 내밀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손이 다가와 손수건을 받는 대신 내 손목 언저리에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늘 그렇게 반 박자 멈춘다.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30대 중반. 서울 말씨인데 문장 끝을 조금 늘이는 버릇이 있었다. "혹시 안 보이시는 거예요."


"네."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괜찮습니다. 다들 그래요." 나는 웃었다. "보이는 분들은 우는 걸 들키기 싫어서 창을 봐요. 그쪽은 창 볼 필요가 없겠네요. 저한테는."


그 말에 그 사람은 조금 웃었다. 웃음과 울음이 섞이면 딸꾹질 비슷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한 번 내고 나서 그 사람은 오래 참았던 걸 내려놓듯 말하기 시작했다.



"동생을 보러 가요." 그 사람이 말했다. "대구에. 1년 됐어요. 작년 이맘때 죽었어요."


나는 위로의 말을 고르지 않았다. 앞이 안 보이게 되고 배운 것 중 하나는 성급한 위로가 얼마나 시끄러운가 하는 거였다. 나는 그냥 들었다. 듣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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