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덫의 철학

돌덩이를 더 세게 때릴수록 더 세게 맞는 상황에 대하여

by김경훈

논문 심사를 앞두고 이상한 버릇이 생긴다.


같은 문단을 열두 번 읽는 버릇이다. 정확히는 보이스오버가 같은 문단을 열두 번 읽어주는 걸 듣는 버릇이다. 읽을 때마다 이상한 것 같고, 고칠 때마다 더 이상해지고, 더 이상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어지고,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또 이상한 것 같다. 이 순환이 자정까지 이어지다가 보보가 자야 한다고 하면 그제야 저장하고 끈다.


다음 날 아침에 읽으면 멀쩡하다.


이것을 나는 논문 곰덫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이름을 갖다 붙이기 전까지는 그냥 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름이 있는 현상이었다.


캐나다 인디언의 곰덫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수요일 점심이었다.



첨성카페테리아 앞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진다.


나는 이 타이밍을 좋아한다. 밥 먹은 사람들이 빠지고 나면 벤치가 비고, 바람이 들어오고, 햇볕이 적당히 따뜻하다. 탱고는 이 벤치를 좋아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 앉으면 탱고의 긴장이 조금 풀린다. 아마 냄새 때문일 거다. 카페테리아에서 흘러나오는 밥 냄새. 탱고는 식욕과 관련된 냄새를 좋아한다. 훈련과 무관하게.


보보한테 카톡을 보냈다.


경훈: 자기야 점심 먹었어

보보: 응 방금

경훈: 첨성 앞 벤치에 있어

보보: 나도 나가려고 했어 거기서 보자

경훈: 뭔가 재밌는 거 읽었는데

보보: 빈대 급은 아니지?

경훈: 그건 아니야

보보: 다행이다 가는 중


보보가 오는 동안 옆 벤치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낮고 지쳐있었다. 대학원생 특유의 피로감이다. 나는 이 피로감의 주파수를 안다. 몸이 힘든 피로가 아니라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피로. 전화 내용이 들렸다.


"그래서 제가 다시 반박 자료를 준비했거든요. 근데 교수님이 또 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또 반박을..."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 곰덫에 걸렸다.



보보가 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뭐 읽었어?"


"들어봐."


나는 보이스오버를 스피커로 켜고 읽어줬다. 꿀 발린 돌덩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밧줄,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돌에 맞는 곰, 때릴수록 더 세게 맞는 악순환. 그리고 해결바카라. 멈추면 돌도 멈춘다. 멈추고 나서 밧줄을 끊으면 꿀을 먹을 수 있다.


보보가 조용히 들었다.


옆 벤치의 전화 통화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근데 교수님이 또 같은 말씀을..."


보보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봤다.


"저 사람도 들으면 좋겠다." 보보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그 생각 했어."


"근데 우리도 저럴 때 있잖아."


"나는 없어."


"자기야."


"논문 심사 전에 같은 문단 열두 번 읽는 거 얘기하는 거야? 그건 꼼꼼한 거야."


"곰덫이야."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탱고가 내 발등에 턱을 올려놓았다.


이건 "저도 있어요" 의 무게다. 탱고도 곰덫이 있다. 산바카라 중에 고양이를 만났을 때. 무시하면 되는데 계속 신경 쓰인다. 고개를 돌리면 될 텐데 자꾸 그쪽을 향한다. 그리고 내가 목줄을 살짝 당기면 그제야 방향을 바꾼다. 탱고한테 나는 밧줄을 끊어주는 사람인 셈이다. 고마운 역할이다.


"에픽테토스 생각난다." 보보가 말했다.


스토아 철학이 나왔다. 칸트도 아니고 푸코도 아니고. 보보의 철학 창고는 항상 예상보다 넓다.


"스토아 철학에서 핵심이 뭐냐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는 거야. 곰이 돌덩이를 통제할 수 있어? 없어. 돌덩이는 밧줄에 매달려있고 물리 법칙대로 움직여. 근데 곰은 자기 반응은 통제할 수 있잖아. 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근데 곰은 그 구분을 못 하는 거지."


"화가 나니까. 감정이 판단을 덮어버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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