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의 미학

진화는 가끔 너무 열심히 한다

by김경훈

연구자로 살다 보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은 순간이 온다.


인터뷰 하나에 전사본 80페이지, 코딩 작업 3주, 현장 노트 두 권. 어느 순간 내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건지 데이터에 잠식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연계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과잉 따위는 귀엽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빈대다. 학명은 키멕스 렉툴라리우스. 당신의 침대 매트리스 속에 살 수도 있는 그 친구다. 읽고 나서 오늘 밤 잠을 못 자도 필자는 바카라임지지 않는다.



빈대의 첫 번째 특성은 지속 발기증이다. 하루에 최대 200번 교접한다. 24시간을 200으로 나누면 7.2분에 한 번꼴이다.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아니, 밥보다 이걸 더 먹는다. 진화가 이 친구한테 딱 하나의 미션만 부여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미션에 매우 충실하다. 이 정도 몰입이라면 질적연구 현장 조사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든다가, 바로 접는다.


두 번째 특성은 무차별성이다. 빈대는 자기 종족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수컷과 암컷을 구별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그 결과, 교접의 50퍼센트는 동성 간에 이루어지고, 20퍼센트는 아예 다른 종과 이루어진다. 순수하게 빈대 암수 간의 교접은 고작 30퍼센트다. 이쯤 되면 번식이 목적인지 그냥 습관인지 불분명해진다. 슬롯과학적으로 분석하자면, 빈대의 행동에서 '의도'와 '결과'는 거의 무관하다. 행위자는 목적 없이 행동하고, 구조가 알아서 결과를 만든다. 기든스가 들었으면 뭔가 한마디 했을 것 같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경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안내견 탱고의 눈으로 길을 보고, 시각장애인 연구자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1,28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99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두리안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