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한 그릇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있는가
언어 하나가 세계관 전체를 뒤흔드는 순간이 있다.
식민지(植民地). 한자로 풀면 '사람을 심는 땅'이다. 이 세 글자를 처음 제대로 들여다봤을 때 잠깐 멍했다. 사람을 심는다. 씨앗을 뿌리듯 사람을 이식한다. 그 이식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돈을 벌고, 그 돈이 본국으로 흘러간다. 개념 하나가 구조 전체를 품고 있다. 슬롯과학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생각보다 자주 온다. 언어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연구자의 직업병이기도 하고, 유일한 특권이기도 하다.
오늘은 카레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카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카레는 질적연구의 교과서적 사례다. 겉으로 보이는 것, 즉 노랗고 걸쭉한 소스와 밥의 조합 뒤에 그것이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긴 맥락이 숨어있다. 인도에서 시작해 영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식민지 조선으로, 그리고 지금의 한국으로. 마살라가 커리가 되고, 커리가 카레가 되고, 카레가 3분 카레가 됐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음식 하나가 얼마나 많은 권력 관계와 우연한 질병과 어이없는 인간적 고집을 품고 있는지가 보인다.
시작은 인도다.
인도인들은 모든 요리에 향신료를 뿌린다. 중국인들이 모든 것을 기름에 볶듯이. 마살라는 그 향신료들을 조합한 소스인데, 본래 케첩이나 고추장처럼 음식에 곁들이거나 찍어먹는 양념에 가까웠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기와 채소를 넣고 푹 끓인 요리 개념이 아니었다. 인도의 기후와 현지 쌀, 난과 함께 먹기 좋게 발전한 향신료 혼합물이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카레와는 꽤 다른 물건이었다는 얘기다.
이 마살라가 유럽인들의 눈에 들어온 건 대항해시대 이후의 일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인도에 발을 디뎠고, 그 뒤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들어왔다. 앞선 두 나라가 항구 확보에 만족했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 자체를 원했다. 1600년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뇌물과 대포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인도를 잠식해 들어갔고,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를 장악했다. 식민지화의 교과서적 수순이다.
영국에게 인도는 노다지였다. 향신료, 홍차, 목화, 그리고 그 목화로 만든 면직물을 소비할 거대한 인구.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인도를 오가는 선원들이 먹을 식량이 자꾸 상했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고, 열대 기후는 부패를 가속했다. 그 결과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 C 부족으로 발생하는 이 병은 당시 해군 사망 원인 1위였다. 전투로 죽는 사람보다 괴혈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제국을 건설하다가 정작 밥이 상해서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장대하지 않다.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마살라였다. 강한 향신료 덕분에 다소 상한 채소도 문제없이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재료들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선원들이 자신들의 스튜에 마살라를 넣기 시작하면서 커리는 처음으로 영국에 발을 디뎠다. 이것을 공식적으로 영국 왕실에 소개한 인물이 워런 헤이스팅스다. 동인도 회사 직원 출신으로 훗날 인도 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1772년, 그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마살라를 헌상하면서 커리 역사의 공식 원년이 열렸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것이다. 영국이 커리를 받아들인 건 맛있어서가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는 것. 제국의 음식 이야기는 낭만이 아니라 필요에서 시작됐다. 커리가 영국 본토에서 자리 잡는 과정에도 자본이 개입했다. 향신료를 일일이 구해서 커리를 만드는 건 복잡하고 낯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커리 파우더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커리는 영국인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복잡한 음식을 파우더 하나로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어딘가 즉석카레의 선조처럼 느껴진다.
영국에서 자리를 잡은 커리는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이름이 바뀌었다. 커리에서 카레로.
일본이 카레를 받아들인 이유도 영국과 똑같다. 병 때문이었다. 다만 병의 종류가 달랐다. 영국이 괴혈병이었다면 일본은 각기병이었다. 비타민 B1 부족으로 생기는 각기병은 쉽게 피로해지고, 팔다리가 떨리고, 몸이 부어오르며,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른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해군 병사들 상당수가 이 병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원인은 밥이었다. 더 정확히는 흰 쌀밥에 대한 집착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입대한 병사들은 집에서 먹던 잡곡밥 대신 흰 쌀밥을 양껏 먹을 수 있게 됐다. 이게 문제였다. 도정한 흰 쌀만 먹으면 비타민 B1이 부족해진다. 설상가상으로 해군 병사들은 부식비를 지급받았는데, 그 돈을 고향에 송금하거나 도박에 써버리고 정작 반찬은 사먹지 않았다. 쌀밥만 먹다가 픽픽 쓰러졌다. 나라가 밥값을 줬더니 병사들이 쌀밥만 먹으며 쓰러지는, 제국주의적 아이러니다.
잡곡밥을 배급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실제로 그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반발했다. 흰 쌀밥을 빼앗긴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집단 반발이 일어났다. 흰 쌀밥의 권력을 여기서 실감할 수 있다. 영양학적 정보보다 입맛이 먼저였다. 지금 누군가가 "건강을 위해 현미밥 먹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오는지를 생각하면, 이게 100년 전 이야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해군 수뇌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카레였다. 돼지고기, 감자, 당근, 양파를 잔뜩 넣어 카레 소스와 함께 밥에 얹어 내는 방식이었다. 이 재료 조합이 각기병을 예방했다. 게다가 '그래도 쌀밥'이었다. 낯선 소스가 얹혀 있어도 바닥은 쌀밥이었고, 고기와 채소가 들어있어서 반찬을 따로 살 필요도 없었다. 병사들의 저항이 줄었다. 이때부터 일본 해군은 매주 한 번씩 카레를 배식했는데, 일주일 동안 먹고 남은 채소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각기병 예방과 잔반 처리를 동시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였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일본 해상자위대에 남아있어서, 자위대원들은 냉장고가 있고 비타민제가 넘쳐나는 지금도 매주 한 번씩 카레를 먹는다. 목적이 사라져도 관행이 남는 것, 슬롯학 교재 첫 챕터에 나올 법한 패턴이다.
반면 육군은 이 변화가 늦었다. 장기 항해를 하지 않아 각기병에 덜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 댓가는 컸다. 청일전쟁에서 전투로 전사한 병사보다 각기병으로 사망한 병사가 더 많았다. 더군다나 당시 육군 군의총감이 각기병의 원인을 바이러스라고 고집하면서 식단 개선에 반대했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틀린 가설을 끝까지 믿었다. 러일전쟁에서도 상황은 반복됐다. 전투가 아니라 밥상에서 병사들이 쓰러졌다.
이 사람의 이름은 모리 오가이. 훗날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이름을 남긴 그 사람이다. 뛰어난 소설가가 뛰어난 의사이거나 과학자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가 몸소 보여줬다. 아울러 권위 있는 전문가의 고집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도. 훌륭한 문학적 업적과 엄청난 정바카라적 실패를 동시에 남긴 인물. 연구자로서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카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왔다.
처음 조선에서 카레가 등장한 건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백화점 양식당이었다. 1920년대 경성의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 레스토랑. 지금으로 치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처음 먹어본 이색 요리 같은 위치였다. 먹어봤다는 사실 자체가 근대적 경험의 증거였다. 당시 잡지와 신문에는 라이스카레에 대한 동경이 담긴 기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이 풍경을 상상해보면 꽤 선명하다. 처음으로 양식당에 온 어린 사환이 눈을 크게 뜨고, 카레가 얹힌 밥을 바라보다가 숟가락으로 한 입 넣는다. 그러고는 경탄한다. 잡지사 기자가 "이건 일본 음식이 아니라 인도 음식"이라고 하자,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돈 셈"이라며 카레 소스가 잔뜩 묻은 숟가락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 숟가락 끝에 인도, 영국, 일본이 담겨 있다는 건 몰랐겠지만, 감각으로는 알았을 것이다. 뭔가 길고 복잡한 여정을 거쳐온 맛이라는 걸.
우리도 마찬가지다. 3분 카레 봉지를 뜯을 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카레가 보급되는 속도는 흥미롭다. 다른 서양 음식들이 조심스럽게 적응 기간을 거친 것과 달리, 카레는 비교적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이유가 있다. 카레의 매운맛이 김치와 고추장으로 단련된 조선인들의 입맛과 궁합이 맞았다. 매운맛에 관한 한 조선인들은 검증된 수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채소와 고기를 함께 넣어서 따로 반찬이 필요 없다는 실용성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밥 위에 카레를 얹어 먹는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비벼 먹었다. 먹는 방식에서 이미 현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외래 음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비비는 방식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진짜 저항이었을 수도 있다.
카레의 대중화를 보여주는 흔적들은 당시 신문 곳곳에 남아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는 카레 얼룩 세탁법이 실렸다. 설탕물을 이용하면 된다는 팁이었다. 비싼 양식당에서나 먹던 음식이 이제 세탁 꿀팁을 다루는 생활 기사에 등장하게 됐다는 것은, 그 음식이 일상에 상당히 깊숙이 들어왔다는 증거다. 1934년에는 찬밥이 남았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요리로 라이스카레가 등장한다. 선망의 요리에서 찬밥 처리용 음식이 되기까지, 불과 10년이 걸렸다.
더 재미있는 건 비슷한 시기에 실린 다른 기사다. 카레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를 질타하는 내용인데, 카레는 고온다습한 지역의 음식이라 먹으면 오히려 체온이 내려가니 겨울에는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바로 전 해에 실린 기사에서 카레를 겨울 음식으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1년 만에 정반대 주장이 나왔다. 건강 정보가 계절마다 뒤집히는 현상은 2020년대만의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음식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해방 이후에도 카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물러났지만 카레는 남았다.
해방 직후인 1950년 경향신문에는 카레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엄동설한에 길거리에서 만취한 술꾼들이 라이스카레를 제조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정뱅이가 앞으로 꼬꾸라지며 구토하는 것을 당시에는 라이스카레 만든다고 표현했다. 그 시절에도 카레의 색깔과 질감이 이미 그런 비유를 가능하게 할 만큼 대중에게 익숙했다는 얘기다. 음식이 문화에 완전히 스며들었다는 증거로, 다소 불명예스럽지만 꽤 확실한 지표다.
1969년 오뚜기의 전신인 풍림상사가 국내 최초로 분말카레를 개발하면서 카레는 본격적으로 대중화됐다. 이제 집에서도 간편하게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81년, 3분 카레가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끝이었다. 고기와 채소를 볶고 카레 파우더를 넣고 끓이는 과정이 통째로 생략됐다. 맞벌이 가정이 늘고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이 편리함은 강력한 무기가 됐다. 인도의 마살라가 수백 년을 거쳐 결국 전자레인지 3분짜리 식사가 됐다. 진화의 방향이 항상 예측 가능한 건 아니다.
3분 카레의 등장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가정식과 인스턴트 식품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직접 끓인 카레와 봉지 카레가 맛의 기억에서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둘 다 '어릴 때 먹던 카레'가 된 것이다. 이 현상을 질적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꽤 흥미롭다. 음식의 의미는 맛보다 맥락에서 형성된다. 누가 만들었고, 어떤 상황에서 먹었고, 그 기억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3분 카레가 소울푸드가 될 수 있다면, 음식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 질문, 의외로 논문 몇 편이 나올 만한 주제다.
카레는 이제 카레데이도 생겼다. 매년 5월 14일. 재미있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4월 14일 블랙데이까지 연인을 사귀지 못한 사람은 혼자 카레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토르트 카레를 주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현실을 반영한 이벤트다. 각기병을 막기 위해 해군 병사들이 먹던 음식이, 현대에는 솔로들의 자조적 한 끼가 됐다. 음식의 의미 변화를 보여주는 이보다 더 깔끔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카레의 여정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인도의 마살라, 영국 선원들의 괴혈병 치료식, 커리 파우더로의 대중화, 일본의 각기병 예방 배식, 카레라이스로의 현지화, 식민지 조선의 선망 요리, 찬밥 처리용 가정식, 3분 카레, 그리고 솔로들의 자조적 한 끼. 각 단계마다 음식의 의미가 달랐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그 음식을 받아들인 이유도 달랐다.
영국과 일본이 커리와 카레를 받아들인 건 맛있어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받아들인 건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제국의 문물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음식을 국민 소울푸드라고 부른다. 제국의 병사들이 각기병 예방을 위해 억지로 먹던 음식이 어느 나라에서는 솔로들이 자조적으로 먹는 위로식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질적연구에서는 이런 현상을 '의미의 재구성'이라고 부른다. 처음의 맥락과 의미가 지워지고, 새로운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카레는 그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흥미로운 건 그 과정이 항상 같은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것이다. 강제적 도입, 반복적 노출, 익숙해짐, 그리고 향수. 영국 해군은 처음엔 커리를 꺼렸다. 일본 병사들도 카레를 낯설어했다. 조선인들도 처음엔 비싸고 이상한 음식으로 봤다. 그런데 학교 급식에서, 군대 배식에서, 집 밥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정서적 기억과 결합하면 향수가 된다.
지금 당신이 카레를 볼 때 느끼는 그 친근함은, 사실 굉장히 오래되고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카레 앞에서 매번 식민지 역사를 떠올려야 하느냐, 그건 아니다. 경성 백화점 양식당의 그 잡지사 기자도 이런 말을 남겼다. 돈까스나 라이스카레를 좋아한다고 일본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음식을 즐기는 것과 그 음식이 걸어온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탱고도 카레 냄새를 맡으면 귀를 쫑긋 세운다. 탱고는 역사적 맥락 같은 건 알 바 없이 카레 냄새를 좋아한다. 어떤 면에서 탱고는 나보다 훨씬 순수한 미식가다. 같은 냄새 앞에서 누군가는 제국주의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간식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어떤 쪽이 더 건강한지는 잘 모르겠다.
음식의 기원을 알고 나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그 복잡한 여정을 알고 나서 먹으면 한 숟갈에 담긴 것들이 더 두텁게 느껴진다. 인도의 마살라, 영국 선원들의 괴혈병, 일본 해군의 각기병, 경성 백화점 양식당에서 숟가락을 들고 눈을 크게 뜨던 어린 사환. 그 모든 것이 한 그릇 안에 있다. 좋은 질적연구가 그렇듯, 표면의 의미를 걷어내고 그 아래 쌓인 층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카레 한 그릇이 사실은 꽤 두터운 기술의 대상이다.
이식된 것들이 언젠가 뿌리를 내리고 본래의 것이 된다. 식민지(植民地)의 역설이다. 사람을 심었더니, 결국 문화가 자랐다.
오늘 저녁 카레를 먹는다면, 한 숟갈 더 넣을 이유가 생긴 셈이다.